생명농업과 자립사역 / 김경일 선교사(PCK 러시아)
(아래의 글은 2014년 가을부터 통합교단의 신입선교사훈련 시 몇 차례 발제했던 내용들이고, 2023년 6월의 NCOWE 대회 텐트메이커/ BAM 트렉의 사례 발표를 준비하며 다시 정리하고 그 후의 내용들을 보완한 것으로, 지극히 개인적 경험에 근거한 내용임을 밝힌다.)
2014년 여름 한국을 방문했다가 ‘창연’ 이라는 용어를 주창하신 분을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눈 적 이 있다. 성경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창조로 만들어진 세계를 ‘자연’이라고 표기하지 말고, ‘창연’이라는 용어로 바르게 표현하자는 것이었다. 나 역시 생명농업의 현장에서 일하며 자연(自然) 이란 용어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을 물질세계에 얹어놓은 듯한 의도성, 왜곡성이 느껴진다. 모세에게 야웨(스스로 있는 자)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제1원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를 물질세계로 대치해 놓은 듯하여 자연이란 용 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선포하며 시작한다. 그러기에 성경적 세계관은 ‘자연(自然)’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그렇게 지음 받은 ‘창연(創 然)’으로 표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공감할 수 있었다.
2004년 ‘다래생농원’을 시작할 때, 자연농업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선 교신학적 접근의 표현으로 적합지 않게 생각되어 ‘생명농업’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해오고 있다. 먼저 ‘생명농업 현장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십여 년 동안 중국의 변방 연변과 그 인근 러시아 연해 주에 있는 생명농업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나눈 후에, ‘생명농업 현장고민에서
출발한 선교적 과제와 의미들’을 나누고자 한다. 물론 나의 경험은 드넓은 대지 중국의 동북지역 변 방과 연해주의 아주 작은 한 농업현장의 주관적 경험임을 밝힌다,
중국의 경우 지역과 기후 및 환경의 다양성과 차이가 매우 크다. 동남에서 동북으로 이어지는 연 해지역은 비교적 저지대이고, 서남과 서북쪽으로 가면서 해발고도가 높아지는 지형이다. 북쪽으로 부터 극한대, 한대, 냉대, 중간의 온대, 남쪽으로 아열대, 열대 등으로 세계 모든 기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농산물도 특히 과일 종류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경제발전과 교통과 유통의 발
달로 중국 어디서나 모든 기후에서 나오는 과일들을 맛볼 수 있고, 심지어 수입산 과일까지도… 가격
은 아주 차이나지만 말이다. 지표면의 고저가 다르고 위치가 다르니 기후의 차이도 세계적이다. 바닷 가를 끼고 있는 연해지역과 장강유역의 다습기후, 사막과 초원의 고온 건조한 기후, 동북지역과 해발 고도가 높은 서남부 서북지역의 한 냉 건조한 기후, 비교적 사계절이 분명한 동북지역, 사계절이 늘 봄 같은 곳, 사계절이 모두 여름 같은 곳, 한없이 이어지는 평원으로 된 논밭이 있는가 하면 셀 수 없 는 작은 산봉우리들과 골짜기로 이어진 농사의 현장, 거의 구름과 안개 속에서 농사가 가능한 곳도 있고 작열하는 태양빛이 거의 전부인 사막지역의 농사도 있다. 또 같은 지역이라도 토질과 그 해의 기 후와 강우량 일조량의 변화로 인해 똑같은 농업이 될 수 없음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중국의 농업현 장을 다 가본 사람도 없거니와 모두 경험해 본 사람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내가 보 고 듣고 경험하며 고민 했던 ‘다래생농원’(多來生農園)의 생명농업 현장 이야기와 이어서 연해주의 시골 이바나브까 마을에서 진행되는 ‘한알민공동체’를 준비하며 느낀 점들을 나누려고 한다.
- I. 생명농업현장 이야기
- 지난 시절 농업 경험 이야기
어렸을 적부터 시작된 농사와 관련된 경험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한다. 경기도 김포의 한 시골에서 살면서 부지런히 일하시며 일을 시키는 아버지 덕분에 초등(국민)학교 3학년 시절에 아버지와 형과 함께 가래질로 이랑을 만들고 고구마를 심었던 기억이 난다. 세 사람의 협동으로만 일이 되는 가래 질, 세 사람의 정신이 하나로 모아지고 적절한 힘의 균형이 한 곳으로 모아질 때, 일의 능률도 오르고 수월하게 되는 일이다. 그 어린 나이에 가래질 하다가 정신을 안 차리고 일한다고 호되게 야단을 맞 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모판에 물푸기, 모찌기, 모내기, 논 김매기, 밭 풀매기, 뽕나무 밭 풀베기, 누에 기르는 온갖 과정의 일, 땅 파고 거름주기,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 30분씩 인삼 밭을 만들 재료 들 손수레로 싫어 나르기, 똥지게로 인분 퍼 나르기, 이엉 엮기, 누에 섶 만들기, 소 꼴 베기, 염소 기 르기, 토끼 풀 뜯기, 목수 미장일 보조하기…. 두루두루 경험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어린 내게 쟁기질 을 시켜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한 번 해보라 하신다. 그래서 내 키 만 한 높이의 쟁기를 붙잡고 시험해 보는데 곧게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쟁기를 받아 쥐고 “밭을 갈 때는 먼 곳에 시선을 정해두고 갈아야 밭이랑을 곧게 잘 갈 수 있는 거다!” 라는 훈수(가르침) 한 마 디를 듣기도 했다. 언젠가 밭을 다 간 후, 소에게 여물을 주기 전 멍에를 풀어 쟁기질로 굳은 소의 목 등 부분을 몇 차례 문질러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그 때 호되게 야단맞아가며 배웠던
그 일들을 반세기 가까이 흐른 지금 중국 연변과 러시아 연해주 생명농업의 현장에서 옛 추억이 담 긴 아버지의 교훈을 되새기며 사용하고 있다.
신학 졸업 후 충청도 산골에서 목회하며, 유기농업, 자연농업의 강의를 듣고 교인들을 권하여 현
장을 다녀오고 시작했던 경험도 있다. 31년 전 가을(1992년) 선교훈련을 받고, 이듬해 봄 온 가족이 김포공항을 통해 처음으로 출국하고, 천진공항을 통해 중국에 첫 발을 딛게 되었다. 황량한 공항에 군복을 입고 긴 삽을 쥔 사람들이 비행기가 착륙하여 들어오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행기 창 밖으로 본 첫 중국인의 모습이었다. 중형 봉고형 버스를 빌려 짐을 싣고, 천진에서 북경으로 두 시간 넘게 달려오면서 본 차창 밖의 풍경은 산도 강도 작은 언덕이나 개울조차도 안 보이는 긴 평원의 밭 들 뿐 이었다. 봄이라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긴 호미를 들고 일하고 있는 농부들이 가끔 눈에 들어왔
다. ‘저 사람들은 얼마나 지루하고 단조롭고 답답할까!’ 그들을 보며 내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첫 7년, 농촌에서 목회하는 전도원들의 모습을 통해 지난 날 나의 어린 시절처럼, 혹은 나의 목회 시절과 비슷한 어려운 경험들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일하며 목회 자로 부름 받은 일군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삶과 사역의 현장에서 소망을 갖고 기쁨으로 일하며 살 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개혁개방의 산물로 생겨난 돈벌이의 물결, 돈을 쫓아서 연해지역으로, 대도시로, 외국으로 흩어지는 교인들, 젊은이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선봉에 여성들이 남성보다 빠르 게 반응했다. 그로 인해 옛날(70~80년대) 한국의 농촌처럼 이농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더 욱 급속한 속도로 휘몰아간다. 농촌은 아담의 후예들이 땀 흘리며 고생하는 저주의 땅이요,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되는 것인가? 농민은 꼭 힘들고 불행해야만 하는 것인가? 성경적인 관점으로, 신학적인 고민과 사색을 해 보아도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부르심을 받은 삶의 자리가 어느 곳이든지, 하나 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소명 따라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면, 바로 그곳은 인생 의 의미와 삶의 가치가 있고, 그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과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 는 곳이어야 하지 않은가!
- 생명농업사역 시작 이야기
선교현장에서 첫 7년이 지나갈 무렵 건강의 악화로 고생하다가 새 천년(2000년)을 병상에서 맞 았다. 14개월 동안 꾸준히 약을 복용하며 병을 치료했고, 그 때에 생명과 건강과 행복을 누리는 삶이 ‘생명농업’의 현장에 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시점, 사역현장에 ‘자연농업 전문가’ 한 분이 오 게 되었다. 함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혹은 여러 지역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농업의 가 치관과 기술을 보급하며 지도하는 일을 통해 자연농업의 이론과 기술을 깊이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3~4년이 흘러가며 함께 일을 시작했던 팀은 와해되어 흩어졌고, 전문가 분도 그만두고 돌아갔
다. 그동안 농업교육을 받고 어려운 형편 가운데 시작했던 자연농업의 현장들이 재정경영의 어려움 으로 하나 둘 농업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제일 큰 요인은 판로가 안정적이지 않고, 당시(2000년대 초)만 해도 아직 생태농업이라는 용어도 생소했거니와 비싼 농산물을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
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과 건강에 유익한 먹거리를 생산하려는 농민에겐 정직이 필수요 우선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보편화 되어 있는 성장촉진제나 호르몬제, 항생제 등 각종 수단과 방법으로 생산단 가를 낮추지 않으면 가격경쟁력이 없기에 도태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고품질(오염이 덜된)의 농산 물은 가격이 차별화 될 때 지속적 생산이 가능하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아직 그런 것들을 찾아 주지 않으니 생명과 건강에 유익한 농산물임을 알리는 홍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가능한 방 법들을 총동원했다. 품질을 검증하는 기관에 비싼 비용을 내고 품질을 검사하여 나온 자료를 만들 어 인근소도시의 대형 상점의 전문매장을 찾아다니며 알리고 설명했다. “그것이 좋은 것인 줄은 알 겠는데, 저 사람(농민)이 생산한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 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라는 반응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풍조가 사회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전문매장을 가진 주인이 나 판매원들이 유해중금속 원소의 기호나 농약성분 등을 읽거나 이해하고 있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 러니 이 좋은 상품이 구별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래도 경제가 치솟고 있는 중국, 거부들이 수천만이나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상품을 사 먹을 수 있는 잠재 고객이 있다면 판로의 길이 불가능 하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길을 찾아야 만 한다. 문제는 이 일을 시작하고 있는 우리에겐 유통시스템이나 판로 망이 없다는 점이다. 만들면 되는데,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가동할 돈도 없는 것이다. 한참 후에 알았지만 작은 판매점 하나 개설 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산자 협동조합을 구성했지만 그것을 가동시킬 조직이나 재정능력이 없었고, 또한 이곳의 사회분위기상 외국인의 신분으로 무슨 모임을 만들고 가동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에, 아직 가동해 보지 못한 채로 사역을 멈추어야만 했다. 이렇게 농업보급이 시작되어 3~4년의 시간 이 흘러갔다. 꿈을 가지고 시작했던 농가들이 하나 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해보니 너무 힘들고, 더군 다나 계속 들어가야 하는 사료 값이 바닥나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농가 인근에 장이 서는 곳에 서는 맛과 품질로 인정받아 살아남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한국에 가는 행렬이 늘어 나고, 이곳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남는 것도 시원치 않으니, 고민하다가 거의 포기하고 한국으로 다른 도시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런 과정을 지내며 함께 현장을 만들고 농업 교육을 진행하던 협력 팀마저 재정적 압박과 경영 방식의 불일치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농업의 기술과 아직 포기할 수 없는 생명농업에 대한 꿈과 열정, 그리고 사명이었다.
- 다래생농원 건립 이야기
2004년 이런 비전을 실행에 옮길 교단 사역 팀을 구성하고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모금의 한계로 시작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선교현장에서 십 여 년이 지나며 특히 생명농업을 시작한 지난 몇 년 동 안은 농업교육과 방문 지도 등의 일들로 차량이 절실히 필요했으나, 사역자에게 무슨 돈이 있으랴!
필요한 차량을 마음속에 두고 기도하는 중, ‘차량을 선물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차량이 있는 셈치
고 매월 차량운행에 필요한 금액을(보험료, 기름 값, 양로세) 모아서 사면되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어서, 생활비를 반으로 나누어 쓰는 활동비 중에서 매월 조금씩 모아가기 시작했다. 2년 쯤 되니 5만 위엔(당시 한화로 800만원) 가까이 모아져 있었다. 차량을 사자면 1~2년 더 모아야 할 것 같았다. 그 때 ‘이 돈으로 생명농업을 다시 시작하자!’ 는 마음이 생겼다. 장소를 물색하고 함께 동업 하며 동역할 사람들을 또 찾기 시작했다. 가까운 인근에 농업교육을 받고 시작했던 현지인과 또 다 른 참여희망자 1가정, 한국에서 사역자로 오신 분 1가정, 이렇게 4가정이 팀이 되었다. 이전에 ‘다래 생산자유통연구회’로 만들었던 이름을 사용하여 ‘다래생농원’(多來生農園)으로 만들었다. 그 의미 는 ‘생명이 많이 옵니다! 건강이 많이 옵니다! 행복이 많이 옵니다! 그러면 돈도 많이 옵니다! 감사! 행 복! 기쁨! 나눔과 누림!’ 이란 고백과 구호가 있었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지어진 이름이었다.
자연농업 기술위주의 농업현장이지만, 유기농업, 친환경농업의 각종기술과 방법들을 응용해야 하기도 했거니와, 또한 “자연(自然)”이라는 용어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창조세계를 표현하는 용어로 는 부적절함을 느꼈기에 “생명농업”이라는 용어로 바꾸었다. 생명과 건강, 행복을 허락하신 하나님 의 창조세계를 잘 가꾸고 돌보는 책임자로서의 농민!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농업! 하나님의 생명 의 역사에 순응하므로 생산된 생명의 먹거리들을 나누며 누리는 생명농업현장! 이라는 의미를 담아 “다래생농원”으로 이름 지었다. 이렇게 직접 생산현장에 뛰어들었고 판로개척이라는 시퍼런 꿈과 사 명감, 두려움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기대하며 출발했다. 판로와 유통의 길을 열어가지 않으면 이제 막 시작된 이 땅의 생명농업이 고사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상식적으로 떠오르는 다양한 판로의 전략들을 따라 실천해 보면 길은 분명히 열릴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전략들 중 그 어느 하나 시원하게 진행시킬 능력이(재정, 경험, 기술) 내게 없음을 한참 뒤 에야 깨달았다.
- 생명농업의현장 ‘다래생농원’ 우물 팠던 이야기
초기공사를 진행하는 일은 안 해본 일을 하는 것이라 좀 서툰 곳도 있었지만, 계사를 짓고 배운 기술을 기초로 지역의 기후환경을 고려하여 병아리 육추시설을 만들고 병아리를 넣어 길렀다. 쥐 로 인한 피해가 있었지만 잘 커주었다. 계사를 짓고 병아리를 넣은 후, 관리인숙소를 겸한 참관자들 의 교육 공간(결국 작업실이 되고 만 거실 한 칸)을 지었다. 전기를 끌어들이는 공사, 닭도 길러야 하 고 사람도 살아야 하기에 우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물 파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했다. 첫 번 은 물이 좀 나오다 말았다. 두 번째 옮겨서 파내려가다 뚫고 내려가던 시추공구가 빠져나오지 않아 (수직선이 맞지 않아 무너진 흙 때문)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 다가오는데 당장 건수라도 필요 했기에, 처음 팠던 곳에 우물이라도 팔 요량으로 처음 5미터 가량을 포크레인으로 파고 사람이 파내
려 가는 중 1미터 두께의 암반층이 넓게 나오므로 우물 파는 것도 중지했다. 결국 우물 공사는 해를
넘겨 이듬해 봄 언 땅이 녹은 후, 겸손히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네 번째 시추작 업 끝에 멈추지 않는 물줄기를 얻게 되었다. 파내려가는 과정에 무너지는 지하 지반으로 인해 직경이 넓은 쇠관을 박아가며 계속 시추작업을 하였다. 시추업자가 “와서 관위에 귀를 대보라”고 했다. 귀를 관 위에 대어보니 물소리가 들리는데 지하 50미터 아래에서 큰 개울이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 었다. 할렐루야! 삼세번도 지나고 네 번째 여서일까? 너무 감사했고 기뻤다. 실험적으로 3일간 물을 계속 뽑아 올려도 멈추지 않는 샘물을 드디어 얻게 된 것이었다. 광야를 행진하다 마라의 쓴 물을 지 나 엘림에 도착했던 이스라엘이 그렇게 기뻐했을까!
그런데 이 우물 없이 첫 겨울이 왔다. 천여 마리의 닭들이 먹는 물의 양은 만만치 않았다. 1km 정도 떨어진 아래 동네의 샘에서 경운기로 물을 실어다 공사도 진행하며 닭도 먹여야 했다. 겨울이 곧 다가오는데 빠듯한 자금 중에서 우선 다급하게 중고 미엔빠오(소형봉고차)를 구입했다. 함께 일 하는 현지인이 운전면허도 없는데 면허는 어떻게 만들었고, 이 차로 운전실습을 하다 보니 다양한 접촉사고들로 차량 수리가 빈번하였다. 심지어 밤에 주차해 놓은 차의 바퀴를 빼어가기도 했다. 이곳 의 겨울은 혹한이다. 섭씨 영하 25도 이하로 내려가는 때가 몇 차례 있다. 이 소형 미엔빠오 차량을 이용해 물통에 물을 담아 싫어 날랐다. 물통 뚜껑의 아구가 잘 맞지도 않고 또 경사 길과 울퉁불퉁 한 비포장 길을 올라오다 보면, 물이 출렁거려 넘쳐 차 안에서 얼어붙었고 도착 후 차량의 얼어붙은 문을 두드려 열어야 했다. 한겨울을 이렇게 지나고 났더니 차량 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빠지고 고장 이 났다.
- ‘다래생농원’ 양계이야기
겨울이 되면서 자란 닭들이 계란을 낳기 시작했다. 3월이 되자 매일 매일 생산된 계란이 늘어 너 무 신기하고 기뻤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계란이 생각처럼 팔려 나가지 않았다. 들어간 경비와 생명농 업의 정성으로 기른 닭이 낳은 계란을 일반 계란처럼 헐값에 넘기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 다. 소비자 직판을 시작했고, 다른 대도시들에 알고 있는 사역자들을 통해 광고용으로 보내기도 했
다. ‘쌓이는 계란이 스트레스가 되다니!’ 경영가동이 되려면 팔려야 하는데… 그러나 우선 믿음으로 고아원 경로원 등 몇 곳에 기증을 하고 나면 쌓여있는 계란이 보이지 않아 속이 오히려 편했다. 봄이
되니 계란이 더욱 쏟아지기 시작했다. 판로를 찾으면서 먼 곳으로 담아 보낼 포장용 박스를 만들어야 했고, 소형 포장함은 적합한 것을 찾지 못해 한국의 것을 사서 들여왔다. 작은 여유자금이 빨리 바 닥날 수밖에 없는 요인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이곳저곳에 계란을 보내어 팔기도 하고 기증도 하 고 직접 판매해 보지만, 채 한 달도 못 되어 수천 개씩 계란이 밀려 쌓이기 시작했다. 아! 봄이면 찾아 오는 부활주일!, 알고 있는 대도시의 한인교회 두어 곳에 연락했고, 감사하게도 주문을 해준 교회는 주문 이상으로 보냈고, 사정이 있어 주문을 못하는 교회에도 광고용으로 보냈다. 이렇게 하는데도
계란은 계속 쏟아져 나왔고 한두 달 지나가며 또 쌓이기 시작했다.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하나는 사료급여량을 줄여서 산란율을 낮추자는 생각이었고, 또 하 나는 이미 두어 달 넘게 밀린 계란을 깨어서 사료용 아미노산액을 만들기로 했다. 큰 플라스틱 통에 대략 3,500개 정도의 알을 하나하나 깨어 넣고 흑설탕을 넣어 나무로 휘젓고 있는데, 잘 알고 지내 는 연세 많으신 사역자 한 분이 우연히 농장에 올라오셨다. 이전에 한국에서 목회하면서 이런 농업사 역의 과정을 직접 경험하신 분이었고, 이곳에서 D마을 본부장으로 계시며 자연농법 기술을 보급할 때 장소와 숙식을 책임지며 함께 참여하셨던 분이었다. “아니! 이 아까운 계란을 왜 이렇게 깨고 있어 요?” “예! 다 팔리지 않고 쌓이게 되니 사료용 아미노산액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헐값에 팔아버리기 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요!” “그러지 말고 인근도시의 D기술학교에 제빵 전문가 분이 와 계시니, 이 계란을 가지고 가서 고급 카스테라를 만들어 봅시다!” 본인의 과거 경험으로 보면 일반계란을 사용 한 카스테라와는 맛이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후배를 향한 애정 어린 권고를 듣고 다음 날 계란을 두 상자(600여개)를 싣고 가서 최고급 종류인 ‘나가사키식 카스테라를 실험적으로 만들 었다. 촉촉하고 부드러우며 맛과 그 향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남은 계란으로 카스테라를 만들어 팔 기로 했다. 카스테라를 만들어 팔려면 우선 담는 상자를 만들어야 했고, 상자의 사진 디자인 작업을 해야 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포장박스에 넣고 왜 맛이 좋은지 간단하게 광고 문구도 넣 었다. 계란 담던 포장박스를 이리저리 잘라가며 카스테라 빵이 들어갈 수 있도록 예쁜 보석함처럼 디 자인을 했고, 다래생농원의 마크도 새겨 넣고 역동적인 하트 마크도 넣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은 포장박스도 제작하는 최소 분량이 5,000매였다. 역시 목돈이 들어가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곳 으로 계란을 보낼 때는 파손의 우려가 있어서 농장의 봉고차로 실어 보냈고, 빵을 받을 때는 지역을 운행하는 시외버스 편으로 받았다. 빵은 너무 맛있었다. 이곳저곳 주문을 받아 계란과 함께 배달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분들이 장사하는 식당 등에 위탁해서 팔기도 했다. 자연히 시간이 경과한 것들이 나 운송 중 파손된 것들은 농장 식구들이 먹게 되고, 시간이 지나서 만드는 곳에 생산경비, 차량운행 비, 받을 때 송료 등을 계산해보니 남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계란을 소비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 다. 들어 갈 때는 목돈이었고 수입은 푼돈이었다.
이렇게 들어온 푼돈은 농장의 자질구레한 경비 발생으로 들어가 버리고, 결국 사료나 옥수수구 입, 박스제작비, 인건비 등의 목돈은 새로 끌어다 보충해야하는 재정경영의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초가을에는 계란이 여유분이 있어서 계란의 유해중금속 함량을 전문으로 검사하는 질량기술 감독 국에 의뢰하여 현금이 아닌 계란 3,000개를 대신 주고 품질을 검사하기도 했다. 최고 품질임이 검사 결과의 수치로 입증이 되었다.
또한 산란량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사료급여량을 줄이기 시작했다. 사료의 양을 20% 줄이니 산
란량이 절반으로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조금 더 줄여 나가니 산란량이 갑자기 급감하는 것이 아닌
가! 닭의 생존을 위한 사료가 70%라면 사료를 줄여서 산란량을 낮추는 방식은 경제적으로 더 큰 손 실을 가져옴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가을로 접어들며 닭들이 털갈이를 시작했고, 거의 알을 낳지 못했다. 기존에 사먹던 소비자들에게도 공급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사료를 70%씩 먹고도 계란 을 안 낳는 것보다 사료를 적정량 먹이고 계란을 낳도록 하는 것이 경제적 손실이 줄어든다는 사실 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잘 먹여 생산효율을 높이고 최선을 다해서 파는 것이 상책임을 발견했고, 우 여곡절을 경험한 후에 생산의 1/10과 남은 것은 필요한 곳들에 기증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증하는 일도 시간과 정성과 경비가 들어가야 가능했다.
- 동업자들 떠나보낸 이야기
다래생농원을 시작하면서 함께 동업자로 참여했던 한 분이 석 달도 채 안돼서 경영방식이 틀렸 다고 이의를 제기해 논쟁을 벌이다 결별하게 되었다. 문제는 함께 참여한 현지인 동업자들의 생활비 지급문제였다. 한국에서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던 분이다. “동업자들인데 농장경영에 이윤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활비로 급여를 주는 것은 경영원리상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런 식으로 농장 을 운영하면 망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현지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모든 재산과 땅을 들여 놓고 함께 일하고 있는데, 가족들이 당장 매일 먹고 살 수 있는 생존에 필요 한 급여를 미리 지출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설득해 보았지만 견해차를 줄일 수 없었다. 고성이 오 가며 서로 답답해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끼어들어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계속 참여할 의사는 있나요?” 물으니, 이런 방식으로 하면 자신이 빠지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출자한 금액 을 돌려주겠다고 아내가 못을 박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계사를 짓고 관리인 숙소를 짓느라 이미 다 들어가 버린 돈을 무슨 수로 돌려줄 수 있단 말인가! 격렬히 논쟁하던 두 당사자가 어안이 벙벙해졌 다. 내달 초 언제까지 출자금을 주겠노라고 날짜까지 말하고 있었다. 아니! 당신 어떻게 하려고? 논쟁 은 이렇게 끝이 났고 동업의 관계는 정리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결혼 후에 살면서 아들 둘의 백일이 나 돌 때 들어온 것, 명절에 아이들이 받은 세뱃돈, 손님들이 준 용돈까지 하나도 쓰지 않고 아이들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아이들 대학 들어갈 때 첫 학비로 내겠다고 17~8년을 모아오고 있던 돈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돈을 찾아 그 사람의 출자금을 돌려주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 역시 출자금 을 낸 동업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 후로 우리의 생활비를 후원하는 정회장님이 개인적으로 몇 차 례 나누어 출자금을 보태어 주셨다. 어쩔 수 없이 기술자를 써야 하는 경우 말고는 몸으로 때워 돈을 아껴 사용하는 데도 불구하고, 작은 농장 하나 세워나가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들어가는지! 이처럼 어렵게 다래생농원 현장이 세워지게 되었다.
- 다래생농원 생존의 몸부림
2~3년 지나며 새로 만들고 써야 할 곳은 더 많아졌고, 필요한 기계나 기구도 많았다. 첫 해에 짓
지 못한 돈사를 지었다. 돈사의 내부 시설들은 하찮게 보였지만 돈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다. 옥수수와 사료의 보관을 위한 창고도 지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을 먼저 구입할 수가 없었다. 돈이 부 족했기에, 시간이 흘러가고 계절이 바뀌면서 다급한 것들 위주로 늘 부족한 경비를 지출해야 하는,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 보아도 경영의 악순환이었고 다래생농원 생존 연장의 몸부림이었다. 중국에 들어와 10여 년을 지내며 사업적으로 농업에 접근하다 일찌감치 손들고 포기한 분들의 경우도 보았 고, 사역으로 목축업을 시작했던 분들도 몇 년을 유지하다 결국은 그만 두는 경우들도 보아왔기에, 농업적 접근은 오랜 기간을, 10년이고 15년이고 버티어 내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말도 했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이처럼 긴 시간이 걸릴 것이란 생각은 사실 못했었다. 5년쯤 되면 좀 나아지려나! 하는 기대가 7년쯤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땅의 안식년도 7년 아니었던가! 7 년이 지나가며 내 마음의 기대는 온 몸의 기도로 바뀌어야 했다. 매일 아침 차를 운전하여 농장으로 가면서 나의 마음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장 사료를 사야합니다! 옥수수를 지금 구입해 놓지 않으면 여름 지나면 값이 너무 오릅니다! 곧 월말인데 관리인 월급 주어 야 하고요! 말이 필요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마음의 외침이 입술로는 단 한마디로 튀어나왔다. “아 버지!” 입술만이 아니었다. 온 몸으로 “아버지!” 를 불렀다.
- 현지 동업자들의 불화와 결별
다래생농원이 시작된 지 만 3년이 되어가는 겨울 초입에, 현지인 동업자 두 사람의 관계 속에 불 화가 일어났다. 화가 난 한 사람이 도끼를 들고 찍어 버리겠다고 휘두른다. 급한 김에 도끼를 쳐든 손 목을 붙잡아 뺐고 싸움을 말렸다. 한 번은 지를 쳐들고 상대편 부인 머리를 찍겠다며 욕설을 퍼부 었다. 그 부인은 시퍼렇게 질려 있고, 또 연장을 빼앗고 말렸다. 한 두 차례 동일한 일들이 더 반복되 었다. 화를 참지 못한 그는 농장에서 사용하는 항아리를 모두 부수었다. ‘지가 기드온의 용사도 아니 면서 말이다.’ 도끼를 들고 이제는 싸움을 말리는 나를 찍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찍어봐라!” 담담히 말했더니, 흥분을 참지 못하고 옆에 있는 석탄 보일러를 내리찍어 스테인리스로 된 온수통의 윗부분 이 찌그러 들어갔다. 그 사건 발생 이후 밤이고 아침이고 계속 전화를 걸어 온갖 위협과 독설을 내 뱉는다. 신실하고 착해 보이는 교인이었는데, 한 때는 처소교회의 예배 책임자였다는데, 이렇게 막 나 갈 수도 있구나! 어쩔 수 없이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그냥 결별되 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땅에 농장 시설물들을 건축하고 농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싸 움판에 그 사람 옆에 질이 안 좋은 교사꾼이 늘 붙어 다녔다. 농장을 뺐고, 선교사라는 신분을 고발 하여 추방시키도록 꼬드기는 것 같았다. 농장 진입로를 돌과 나무로 막아놓고 닭 사료도 주지 못하 게 막았다. 하는 수 없이 진정부의 사법을 담당하는 공안원이 오고 당장은 닭 사료와 물을 주게 되었 으나, 길고 지루한 해결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이 일을 해결 조정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발견한
사실은 ‘만약 동업자라고 해서 임금 지불을 하지 않았다면 불법경영으로 사법처리를 받을 수밖에 없 고, 분쟁해결에서 아주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사건 이후로 ‘땅값은 10배로 내고, 사용 할 땅의 면적은 1/5로 축소하며, 사용료 전부를 한꺼번에 내든지 아니면 땅에 세워진 농장의 모든 시 설물들을 돌 하나도 남기지 말고 뜯어가라’는 주장이었다. 현지인들의 싸움으로 일이 아주 복잡해졌 다. 기 싸움에서 밀린 다른 한 사람은 아무런 해결 능력이 없었다. 마을의 이장 격인 촌정부의 서기 를 찾아 사정을 말하고 진(읍)정부 사법담당자의 조정으로 문제 해결 작업을 진행했다. 목돈이 없었 기에 땅의 사용료는 연 1회 10배로 주기로 했고, 토지는 다른 곳의 일부를 제외한 농장주변의 농지 는 모두 사용하기로 하고, 2024년까지 남은 기간의 사용료는 변동치 않기로 합의했고, 합의 내용을 바탕으로 진 정부의 공식합동 문서에 기재하여 3부를 작성하여 촌지부서기의 공식 인장과 진정부의 담당자와 진장의 도장을 찍어 토지 임대를 정식으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았다. 만약 그 당시 이러한 과정이 없었으면 7년이 지난 시점에, 당시 구두의 약속 계약이나 당사자들 간의 계약은 새로 발표된 ‘연변자치주 토지 임대 이전에 관한 새로운 법령’으로 인해 무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추운 겨울 에, 밭을 측량하고 멱살잡이를 당하고 실랑이하고, 다급한 가운데 해결책을 찾아 헤매며 고민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 얼마나 다행스러운 과정으로 느꼈었는지! 감회가 남다르다. 2011년 초부터 남아 있는 현지 동업자 한 사람도 생명농업에 대한 소망을 잃고 방황하다가, 결국은 그해 여름 당당 하게 큰소리치며 투자금을 되돌려 받고 마지막으로 모두 떠나게 되었다.
- 농장 이전을 준비하라는 소식
어느 해 가을 추수가 거의 다 끝나가는 시점에 마을 촌장이 와서 하는 말이 “내년부터 농장 주 변지역에 쓰레기를 소각하는 열병합 발전소가 들어설 예정이고 농장의 터도 포함되었다면서 농장을
이전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로 되어있고, 우리는 그 토지의 경작권을 가진
농민으로부터 매년 임대해서 사용하는 입장이니, 토지에 관한 한 아무 권한이 없었다. 농장의 시설 물들을 어떻게 뜯어 옮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길을 찾아야 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적합 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토지 임대가격이 너무 높거나, 가격이 괜찮은 곳은 전기 도로가 전무한 산등 성이었고, 아니면 너무 멀어서 오고가는 교통경비가 많이 드는 곳 뿐 이었다. ‘지나온 이 과정을 어디 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이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왔는데도 동네에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궁금해서 사람들에게 알아보니, 농장이 있는 마을 주민들이 환경오염을 이유로 반 대해서 쓰레기 소각장은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 몇 년 전부터 농장 아래 직선거리로 대략 150여 미터 되는 곳에 고속철도공사가 시작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고, 그 지점 으로 고속철도 기차역이 들어설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렸다.(2015년 가을에 고속철도는 개통되었고, 고속철도역은 도시의 반대쪽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먼저 농장 위쪽 300여 미터 지점으 로 이웃 도시로 연결되는 외곽 순환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농장 이전의 가능성은
주변의 환경변화로 여전이 잠재해 있었다.
- 값비싼 학습 경험 양계 폐사 이야기
다래생농원 시작 이후 6년이 되는 해에, 5월 하순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6월과 7월 계속 되었다. 구릉지역인 산언덕 중간 지점에 자리한 농장의 밭들이 마치 써래질한 논처럼 물에 불어 풀 베는 작 업조차도 힘들 정도였다. 당시에는 양돈을 시작한 지 3년 정도 되니 곳곳에 보수해야 할 일들이 많았 다. 이런 저런 바쁜 일들로 계사 뒤편의 배수로 정리 작업을 제대로 못한 채 장마를 맞게 된 것이다. 땅이 마를 새 없이 비가 계속 내리니 차일피일 배수로 작업을 자꾸 뒤로 미루게 되었다. 7월 말 쯤에 는 급기야 낮은 지역에 위치한 계사 바닥에서 물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계사 안이 지저분해지고 악 취가 나기 시작했다. 양계로서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급하게 왕겨를 한 차 사다가 가장 물이 많이 솟 아난 칸들에 펴 주었다. 당장은 괜찮아 보이고 상황이 진전되는 듯싶었다. 8월부터는 내려 쪼이는 햇 빛과 함께 무더위가 급습했다. 아직 계사 바닥은 푹 젖은 흙과 왕겨로 인해 상태가 안 좋았는데, 어느 날 일군이 갑자기 닭이 십여 마리 죽었다고 말하며, 나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다. 그 다음 날은 스 물 너 댓 마리가 죽고 그 다음 날은 사십여 마리가, 그 다음 날은 70여 마리가 죽었다. 그리고 그 다 음날은 120여 마리로, 죽어가는 닭의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갔다. 장마로 젖은 바닥을 말리지 못하고 왕겨를 덮어 임시 처방한 것이 큰 화근이었다. 가금콜레라라는 급성 전염병이 온 모양이다.
무더운 삼복에 삽으로 인근의 젖어 있는 밭을 깊이 파고 죽은 닭의 무덤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 다. 이것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계사 관리를 소홀히 한 인재였다. 칠십여 마리를 묻은 다음날 농장에 올라가니 농장의 일군마저 보이지 않고, 닭장의 닭들 절반은 죽어 있고 나머지 절반도 죽어가고 있었 다. 옛날 시골에서 사람 묻는 무덤도 파 본 경험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무덤을 삼복더위에 혼 자 파내려 가는데, 마음의 탄식과 눈물이 진액이 되어 온 몸의 땀구멍으로 그렇게 쏟아졌나보다! 바 퀴 하나인 밀차로 죽은 닭 20여 마리씩 실어다 묻고 또 묻었다. 일군아저씨는 온다간다 말도 없이 갔 다가 몇 일후 닭들의 봉분작업이 모두 마무리 될 때쯤 돌아왔다. 야속하게시리! 그러나 와준 것만도 다행이다. 넓이와 깊이 1.3m, 길이 4m 정도의 큰 무덤을 4개나 파고 묻었다. 평토장했지만 죽은 닭의 부피만큼 볼록해진 봉분의 큰 무덤 4개를 남기고 알을 낳던 모든 닭이 폐사했다. 옆쪽에 별도로 기 르던 병아리에도 전염이 되어 계속 죽어갔고 단지 3마리만 살아남았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며 살아 남은 닭 3 마리 중 1마리는 돼지에게 잡아먹히고, 2마리는 마음껏 노닐며 돼지가 없는 우리 안 포근 한 곳에 알을 낳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물을 캐러 다니는 두 사람이 지나간 후로 그 자유롭게 노닐 던 닭 2마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돼지에게 잡아먹힌 흔적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첫 6년의 자연농 업식 양계 경험은 막을 내렸다. 양계 폐사 사건으로 5년 넘게 자리 잡은 소비자 200여 가정이 16개월 가까이 계란공급이 끊어지므로 인해 소비자를 잃게 되었던 아픈 실패의 경험이 있다.
- 자연농업식 양돈 이야기
다래생농원 시작 둘째 해 돈사를 세우고 파이프들을 용접하여 우리 칸들을 만들고 먹이통과 음수시설을 준비했고, 톱밥을 구입하여 바닥의 발효조 작업을 하기까지 한해가 지나갔다. 3년 째 되 던 초여름에 모돈 2마리와 자돈 9마리를 처음으로 구입하여 양돈을 시작하게 되었다. 돼지들의 천 국 같았다. 깨끗하고 뽀송뽀송한 돈사에서 돼지로서의 자유와 행복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며 잘 자 라 주었다. 아직 종돈이 없어서 어미 돼지들은 인공수정으로 새끼를 배었고 이듬해 겨울에 줄줄이 새끼를 낳았다. 성격이 온순한 크고 늘씬한 어미돼지는 한 번에 18마리까지 새끼를 낳았고, 붉고 검 은 반점이 있는 성격이 까칠한 모돈은 15마리나 새끼를 낳은 적도 있다. 추운 겨울이라 새끼가 얼어 죽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많은 숫자의 자돈이 모두 살아남지를 못했다. 젖을 빨 때 젖꼭지 숫자 가 부족하여 젖꼭지를 차지하지 못하는 놈들은 분유를 사다가 따뜻한 물에 풀어먹이는 정성에도 불 구하고 죽어갔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끼돼지는 귀여웠다. 몇 가지 실수가 있었다. 너무 추운 겨 울철에 분만사가 제대로 준비돼지 않아 어미돼지가 지내던 곳에서 새끼를 낳다보니 폭신하고 따뜻 한 것은 좋았으나, 어미가 사료를 먹고 젖을 주기 위해 드러누울 때 패인 곳에서 새끼들이 빠져나오 지 못하고 압사당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그 후 분만사를 만들고 발열판을 만들었던 일, 돼지의 코에 걸리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뒤집어 엎어버리는 극성으로 다 망가지고, 뒤늦게 난로를 설치하고 보온 등을 달아주며 비닐로 보온 덮개를 만들어 주는 등 다급한 응급조치들을 모두 진행해 보았다.
그 이듬해에는 돼지 숫자가 40여 마리로 불어났다. 들어가는 사료가 만만치 않았다. 여유 자금 의 부족으로 사료용 옥수수나 쌀겨 등을 미리 많이 비축하지 못하여 작은 운영손실 등이 쌓이면 큰 손실이 되곤 했다. 돼지를 넣은 다음 해 부터는 돼지를 잡아 팔아야 했다. 이른 새벽 돼지를 붙잡아 농장의 소형 봉고차에 싣고 전문 도살장에 가져가 비용을 내고 잡아오는 식이었다. 돼지고기를 알리 고 선전하여 계란을 사 먹은 소비자들에게 5근씩, 10근씩, 때로는 반 강제로 때로는 반 요청으로 팔 아 나갔다. 돼지를 잡으면 머리와 발목부분, 내장 등은 농장의 일하는 가정이나 일군들이 가져가고, 살코기는 발골 작업 후에 나누어 팔았다. 일반 돼지들보다 사양 기간이 2배 가까이 길었다. 돼지의 활동공간이 넓어 운동량이 많았고, 풀이나 농장에서 나오는 야채들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100kg 의 돼지로 자라기까지는 11개월 정도 걸렸다. 한국 분들이 주요 고객이었는데 돼지비계 살을 싫어하 여 발골 작업 후 껍질과 비계를 떼어내는 작업도 만만치가 않았다. 정식 작업대가 있는 것도 아니어 서 큰 책상 위에 잡아온 돼지 반 쪽 씩을 올려놓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 작업을 하면 서너 시간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돼지고기 전문 유통업을 하는 분이 어느해 여름 방문팀 중에 있어서 이야기 를 들어보니 자신들은 보통 30분 정도면 한 마리 발골 작업이 끝난다고 한다.
보통100kg짜리 돼지를 잡아 내장과 머리와 발목뼈들을 제거하면 70kg 남는다. 거기에서 가죽
과 비계를 떼어내면 순수 살코기는 48~50kg 정도 남는다. 값을 두 배로 받아도 사양기간이 거의 두
배가 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득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짧은 기간에 최대한 빨리 키우는 인위적 방 법이 절반 값으로 팔아도 이득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처럼 친환경적인 방식으로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사육농가들이 도태되어 가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까지는 소비자들의 경우 값비싼 고급육 보다는 값이 싸고 양이 많은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돼지를 잡는 날은 최고품질의 돼지고 기를 듬뿍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면 그 맛이 얼마나 담백하고 고소한지! 씹히는 쫄깃한 맛까지 느끼 며 함께 행복해했다. 한두 마리는 지역 내의 소비자들 중심으로 소비가 되었지만 잡을 때마다 사먹 으라고 강요할 수 없기에 하루 이틀 유통거리의 대도시들에도 알려서 주문을 받고 잡아 냉동시켜 스 티로폴 박스에 포장하여 고속버스나 화물유통 편으로 보냈다. 겨울철은 기온이 밤낮 영하이기에 변 질의 우려는 없었다.
돼지 숫자가 많아지니 사료양이 급증하게 되어 사료비 절감을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두부를 만 드는 공장에서 매일 비지가 쏟아져 나온다. 돈을 얼마 내 놓고 매일 일정량을 가져갈 수 있다고 해서 실어오기 시작했고, 함께 동업했던 현지인이 아는 분들 중 식당을 운영하는 곳에서 잔반을 받아와 늦가을부터 먹이기 시작했다. 잔반 찌꺼기와 국물에 비지를 적당히 버무려서 주니 잘 먹어 주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고 많이 먹였다. 사료양도 많이 절감되고 좋았다. 두 세 달 잘 먹던 돼지들이 어 느 때 부터인가 그 맛있는 비지 잔반 버무림 특식을 잘 먹지 않는다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돼지들이 아예 먹지를 않는다. 병이 온 것 같아 가축병원을 찾아 문의했으나 방도가 없었다. ‘돼지들이 먹기를 거부하다니!’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단식농성 하는 것도 아니고, 두주 정도 그런 상태가 되 니 몇 달간 오른 살이 쫙 빠지고 너무 날씬하고 생기도 없는 돼지로 변했다. 관계된 서적을 찾아 증세 를 대조해 나가는데, 가축병원에서 예상했던 것 중 하나인 염 중독일 가능성이 확실했다.
가축병원을 다시 찾아 문의하니 염 중독에는 약이 없다고 한다. 그냥 깨끗한 물을 많이 먹여서 돼지 체내의 염 성분을 배출해 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처럼 강제로 물을 먹게 할 수도 없 고, 시간이 흘러가며 면역력 저하로 병이 오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가 죽기 시작하더니 새끼들까지 대여섯 마리가 죽어갔다. 그래서 건강한 종돈과 모돈 몇 마리만 남기고 모두 헐값으로 처분해야 했 다. 새끼를 밴 어미 돼지들은 본능인지 면역력을 잃지 않았다. 남은 돼지들이 더 넓어진 공간에서 자 유롭게 지내게 되었다. 살이 너무 찐 돼지들이 덩치가 커졌고, 비용문제로 얇은 사각 파이프를 사용 한 돼지우리 칸들을 돌아다니며 파이프들이 많이 부러지고 휘어져 모돈사를 수리해야 했다. 그리고 사육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 칸을 만들다보니 철근을 가로로 대고 용접해야 하는데 세로 방향 으로 용접한 것이 실수였다. 새끼돼지들은 키가 길쭉하고 날씬한 형태여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빠져 나가기에 관리에 많은 허점이 생겨났다. 그것도 제대로 수리해야했다. 그래서 사료 값 부담이 최고조
에 이를 때 500근 넘는 종돈과 모돈 모두를 일반시세도 아닌 헐값에 팔아야 했고, 그 때 계획된 돈
사 수리계획이 만 5년 넘게 지연되다가 결국 양계사로 수리하여 사용했다. 그 외에도 땀과 수고, 시간 의 투자와 재정 손실로 얻은 많은 자질구레한 경험들이 있다.
- 밭농사 이야기
첫해는 계사와 숙소로 짖느라고 밭을 가꿀 여유가 없었다. 땅이 쉼을 얻는 해였다. 그냥 놓아두 니 풀들이 엄청 자랐다. 그 풀들과 다른 밭에 심었던 옥수수와 함께 가을 전 푸른 상태로 썰어서 땅 을 판 후, 비닐을 깔고 소금을 뿌려가며 겨울용 풀 사료(엔실리지)로 만들었다. 잘 다져서 밟고 채워 비닐로 봉해 놓았다. 겨울이 너무 추워서 발효가 되는 속은 녹아 있었지만 겉부터 얼어가기 시작했기 에, 12월과 1월초에 좀 꺼내 먹이다가 모두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나머지는 봄이 온 후 닭장의 깔 짚 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처음 5년 어간은 사료용 옥수수를 심었다. 3월 쯤 닭장에서 나온 좋은 유기질 발효퇴비를 경운기로 25대 정도 밭에 내고 갈아 옥수수를 심었다. 첫해에 닭은 1,200마리 넣었기 때문에 계사 전체에서 나오는 퇴비양이 많았다. 60% 정도는 농장 밭에 내었고, 인근에서 야채재배를 하여 보쌈 집을 하는 사장이 와서 한차 실어갔고, 치커리 농장을 하며 경로원을 운영하시는 장로님께서도 실어 갔다. 농장 동쪽 산 너머에서 유기농 재배 농장을 시작하신 교수께서도 두 차를 실어갔다. 첫 2~3년 은 현장을 세워가는 기간이라 밭일 말고도 다른 일들이 많았으나, 동업한 두가정과 밭일 경험이 많 은 일꾼 한 분이 있어서 밭의 풀을 메는 작업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잘 진행되었다. 일부분의 밭에는 당근을 심어서 가꾸기도 했다. 화학비료를 갑자기 사용하지 않으니 산량이 이웃집들 보다 20% 정도 는 준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가며 일군이 나가고, 동업한 사람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데, 분담과 협력이 원활하 지 못하여 3~4년째는 풀이 옥수수 밭을 덮어버렸다. 처음 풀 메는 시기를 놓치고 나니 옥수수와 풀 이 함께 커가게 되었고, 여름에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웠다 오니 옥수수 밭은 풀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 제는 호미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낫을 가지고 밭에 들어가 옥수수만큼 커버린 풀을 베어 내어 돼 지도 먹이고 닭도 먹였다. 풀이 잘 자라는 장마철에는 다 먹일 수가 없었다. 밭이 이 모양이니 이웃 농 가에서 와서 소꼴을 베어갔다. 제초제 사용 없이 농사가 얼마나 힘든지를 몸소 느끼는 시기였다. 일 하는 사람들이 함께 풀을 열심히 베어내면 그래도 표시가 날 텐데, 동업했던 두 사람은 옥수수 풀밭 으로 가능하면 들어오지 않고 다른 잔일들만 하고 만다. 그 해 여름 한 달 반 동안 나는 오기로, 옥 수수인지 풀인지 꼭대기를 다시 쳐다보아야 분간이 되는, 손가락 굵기 만한 풀들을 베어내느라 어깨 와 목이 굽고 허리가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쪼그리거나 허리를 굽혀 풀을 베다 보면 허리가 아파
온다. 통증을 견딜 수 없어, 허리에 손을 얹고 힘을 주어 허리를 펴고 목을 뒤로 제쳐 하늘을 향하였
다. 아버지! 주님! 솔직히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통증을 없애주세요! 제 허리 에 힘을 주세요! 기쁨으로 일하게 해 주세요!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높이 뜬 구름도 쳐다보았다. 한 참(그래봐야 20여초 정도) 쳐다보고 나니 그 아팠던 허리의 통증이 사라졌다. 통증이 이렇게 빨리 없어질 수 있나? 신기했다. 그렇게 하고나니 또 10여분 일 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겼다. 땅만 보고
일하다가 허리가 아프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지” 앙망하면 허리 통증이 빨리 가시어 버리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앞만 보고 살다가, 그것도 먼 날의 앞이 아닌 눈앞만 보고, 땅만 바라보고 살다가, 목이 아프고 어깨 결리고 허리가 아픈 분들이여! 눈을 들어 고개를 젖혀 하 늘을 바라보자! 주님을 앙망하자! 아버지를 부르자!
유기질 발효퇴비를 듬뿍 뿌려 주어서일까? 밭에는 이른 봄부터 자기의 때를 찾아 솟아오르는 풀 들이 무성하기도 하다. 모두 나물이요 약초들이다. 이른 봄 쑥이 솟아나고 달래나 냉이가 싹을 틔운 다. 이어서 민들레, 씀바귀 일종의 ‘쇠투리’, 참비름, 돼지가 아주 잘 먹는 돼지 풀, 봄이 지나가며 돌피 종류, 바래기, 쇠비름, 달개비… 이름 모를 각종 풀들이 자기의 때를 찾아 솟아오른다. 가을로 접어들 때 쯤 ‘내기’라는(방아 비슷한 향이 있어 향신료로 사용) 향이 진한 풀이 난다. 그리고 까마중이 왕성 하게 자란다.
어느 해에는 밭에 쇠투리 라는 풀이 옥수수, 콩과 함께 솟아올랐다. 밭을 매서 닭을 먹이면 닭이 아주 잘 먹는다. 굵고 흰 뿌리가 땅 속 깊이 뻗는 특성이 있다. 생나물로 무쳐 먹다가, 한번은 밭의 일 부지역을 모두 차지한 쇠투리를 뽑아 다듬어 아내가 김치로 담았다. 하얗게 나오는 진액이 잎과 줄기 에 있는데, 아주 씁쓸한 맛이 나면서 식욕을 돋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모두 필요한 것이고 유 익한 것임을, 모두가 약초이며, 향내 나는 차의 재료이며, 유익한 채소이다. 생명을 주는 양식이고 건 강을 회복시키는 약재료임을 밭농사의 깊이만큼 배우게 된다. 작물을 심고 싹이 나올 때쯤은 풀들 이 수도 없이 함께 솟아나는 때이다. 옥수수인지 잡초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콩 옆에서는 콩잎 모양 을 한 놈들이 올라오고, 옥수수 옆에는 옥수수 잎 닮은 놈들이 올라온다. 잡초는 생명력이 강하고 그 수가 많다. 작물이 자리 잡기 전에 잡초가 자리 잡고 세력을 뻗치게 되면 작물은 힘을 잃고 제 구 실을 못하기에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일의 양이 많기도 하고 힘들다. 그 힘든 노동의 일 을 회피하려고 인간들은 꾀를 써서 풀을 죽이는 독약을 개발했다. 그것이 제초제(이곳에서는 살초 제라 부름)다. 그런데 이 맹독성 제초제는 풀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작물도 죽이고 땅도 죽인다. 즉 땅속의 미생물들까지 죽인다는 말이다. 결국 사람도 죽인다. 생태계(환경)의 재앙이 된다. 이것은 하 나님 뜻도 하나님의 계획하심도 아니다. 인간의 욕심과 불순종으로부터 파생된 생명왜곡과 거부의 현상, 생명파괴의 모습이다. 농사의 일에는 농민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농사가 가능하도록 창조하신 땅과 물, 햇빛 공기를 적절히 순환하게 하시는 일기와 기후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 이
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에 인간의 신뢰와 순종이 필요하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정직하게 잘 가꾸고, 보살피며 관리하는 일이다.
밭을 갈고 씨앗을 파종한 후, 싹이 터 잘 자라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은 김을 매는 일이다. 적어도 한 해 농사에 4~5차례 정도 반복되는 이 일을 하는 것 쉽지 않다. 그런 후에는 작물이 축복의 장마 비를 맞으며 무서운 속도로 자라난다. 아름답게 들을 덮고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혀 추수의 가 을을 기다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사계절변화의 하모니, 그 조화 속에 인간의 참여 가 이루어진다.
- 밭농사의 교훈과 과제
1) 씨앗은 제때에 뿌려야 한다. 시기를 한번 놓치면 발아가 잘 안될 수도 있고, 파종시기가 한참 뒤로 밀려나 수확량이 감소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기에 미리 파종준비를 해 놓고 제 때에 뿌려야 한 다. 일찍 뿌려놓으면 잘 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씨앗이 흙속에 있는 수분을 흡수하여 싹틔 울 준비를 하려다, 바깥 기온이 낮으면 싹이 터서 올라오지 못하고 움츠리게 된다. 찬 기운이 지속되 어 그 시간이 길어지면 씨앗이 골게 된다. 처음엔 남들 하는 것보고 하다가 시간이 늦어진 경험이 있 었기에 이듬해는 빨리 심으면 좋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냉해로 씨앗이 잘못되어 두 번 심 어야 했던 때도 있다. 비가 온 후에 심으면 땅의 습도가 높아 잘 될 줄 알았다. 비온 후 밭이랑 로터리 작업을 한 후 수분이 남아 있을 때 심는다고 심어보았다. 밭이랑의 조건이 똑같지 않아 수분이 괜찮 은 곳은 곧 올라왔지만, 수분이 부족한 곳은 한참 후 봄비가 충분히 내린 후라야 싹이 올라올 수 있 었다. 땅 경운작업을 너무 잘해도 바람이 불면 밭의 흙속에 건기가 들어 싹이 올라오지 못하기도 한 다. 큰 트랙터로 땅을 보드랍고 예쁘게 갈아 만든 경우, 같은 시기에 심었어도 한참 뒤에 싹이 올라오 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옥수수나 콩 그루터기 정도만을 부순 상태로 최소한의 정리 작업이 오히려 토양의 보습조건을 향상시켜 주는 것도 경험했다. 똑같은 경작지에서도 해마다 기후조건이 다르기에 농사에 있어 왕도나 정해진 기술을 주장할 수는 없다. 해마다 창조주 경영자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겸손히 구하며 겸허한 자세로 깨어 있고, 성실하게 순종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는 길 밖에 농업의 왕도가 따로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 생명농업으로의 전환을 위해서 최소한의 풀매기는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 이 해 보았다. 풀을 메어주는 농기계. 이런 분야는 돈벌이가 안 되나 보다. 개발이 안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농기계의 도움으로 풀매는 작업이 지금보다 수월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난 이십여 년간 밭의 풀매기 작업을 하며 많이 생각했다. 밭갈이, 로터리작업, 밭고랑의 흙을 파서 잡초의 어린 싹을 덮어줄 수 있는, 그것도 작물이 심겨져 자라고 있는 가운데 작업이 가능한 종합적 기능이 있는
소형 농기계! 중국에서도 알아보고, 한국에서도 농업박람회 하는 곳까지 찾아 가 보았으나 아직 내
마음에 딱 드는 기계는 없다. 한국의 관리기는 다 좋은데 작물 사이의 풀을 메는 것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바퀴의 간격이 이랑과 이랑 사이보다 넓다. 밭의 작물이 커진 상태에서는 밭에 들어갈 수가 없 는 단점이 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바퀴 폭이 좁은 궤도바퀴로 된 소형 밭갈이, 흙덮기 기능이 있는 기계를 발견하여 이듬해 구입하여 사용해 보았다. 소가 있어야 가능했던 고랑의 흙덮기 작업이 가능 했다. 그러나 작은 기계이지만 140kg의 무게가 나가는데, 사람의 힘으로 돌려 회전해야 하는 부분이 보완해야 될 부분이었다. 그리고 써레작업 기능이 없어서 아쉬웠다. 이 두 가지 기능이 보완되면 경 사가 심한 밭이나, 밭농사 풀매기 작업에 아주 유용한 농기계가 될 것이다. 정직하게 땀 흘리며 수고 하는 농민들의 지혜가 모아지면 생명농업의 접근과 실천이 훨씬 수월해 지고, 생명농업의 미래 현장 이 좀 더 행복해질 것이다.
3) 추수도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에 추수 때는 바쁘다. 일손은 점점 부족해지고 농기 계가 대형화 되다 보니 경작지가 넓어진다. 이곳은 어느 해 인가부터 기계로 옥수수를 수확하는 것 이 보이더니 점점 기계화 작업이 많아지고 있다. 그전 어느 해에는 10월 중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 다. 많은 농가들이 추수를 눈밭에서 하느라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다. 생명농업은 많은 농가들이 농 업에 종사하면서 적당한 규모의 경작지를 관리하도록 방향설정을 바르게 해야 한다. 시장 경제의 가 치를 따라 돈을 많이 벌려는 욕심에 근거한 농업 방식의 폐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뿌리 깊은지를 잘 간파하여, 방향과 구체적 목표설정을 올바로 해야 한다. 큰 규모의 농업이 좋은 것이란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회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고려 없이 무조건 대규모적 기업식 농업이나 대형기계화 는 경영비용의 상승과 또 다른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다. 현재와 같은 농가부채의 문제, 일자리가 없 는 현대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추수에도 농지규모에 적합한 기계를 만들고 배 치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에 값이 저렴한 소형기계의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
- 비닐하우스 실험 재배 이야기
연변은 겨울이 길고 봄, 가을이 짧다. 5월이 되어야 풀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노지에서 채소 를 재배하면 5월 하순부터 6,7,8월과 9월 중순까지 채소농사가 가능한 시기이다. 그러니 1년에 4개 월 정도만 노지에서 채소재배가 가능하다. 비닐하우스를 이용하면 채소재배 기간은 훨씬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2012년 비닐하우스를 1동(8m x 42m) 세웠다. 봄~가을까지 8개월 은 야채재배가 가능한 비닐하우스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겨울이 춥 기도 하지만 바람(북서풍)이 대단하다. 그런 이유로 이곳 현지의 비닐하우스는 한국의 것과 전혀 다 른 모습을 띄고 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긴 북쪽 면을 벽돌로 두 장 폭씩(60cm) 두껍게 쌓아 바람 을 막고 뒷면에서 앞쪽으로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어 햇볕이 쪼이도록 하는 구조이다. 공사비용도 만
만치 않거니와 봄과 가을에 햇빛이 강해질 때 온도가 급상승하는 것이 문제였다. 기계로 작동하려면
경비가 많이 들고 손으로 작동하려면 번거롭고 힘든 것이 문제였다. 유기농 채소재배를 시도하던 교 수님 한분도 봄, 가을의 열 조절 관리가 안 되어 결국은 그만두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통풍구조가 용이한 자연농업식 양계사 구조를 철골구조로 하기로 하고 오랫동안 설계구조를 연구 하고 또 연구했다. 처음해 보는 것이라 세심하고 치밀하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수리하고 변경하는 것 이 새로 짖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닐하우스처럼 앞뒷면 비 닐로 하되 천정 부분에 수직 50cm의 개폐가 용이한 창문을 만들었다. 그러기에 앞쪽은 낮은 타원형 곡선이고 뒤쪽은 50cm높은 곳에서 이루어진 타원형 곡선 형태이다.
이곳은 겨울철에 눈이 오면 50cm이상 내릴 때도 있었기에 눈의 하중은 견뎌낼 구조여야 했다. 그래서 파이프를 이중으로 구부려 중간 부분을 파이프로 용접하여 연결했다. 그리고 중앙 부분에는 굵은 기둥을 세우고 사각 파이프로 대들보처럼 두 줄로 용접 연결하여 견고하게 했다. 일반 모양이 아닌지라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비닐을 고정하는 긴 면이 세 곳이고, 감아올리도록 만든 곳이 세 곳, 고정한 비닐이 날리지 않도록 줄로 붙들어 매주는 곳도 용접해야 했다. 지금은 이미 했던 일이 라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가며 여러 날을 궁리하고 연구하면서 새로운 것을 고안하는 긴장감의 기쁨을 맛보았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 실제 설계도를 그려야 했 다. 큰 모양의 비닐하우스 그림은 크기의 모양을 축소하여 앞쪽과 옆쪽 지붕의 환기창 면이 보이도록 그렸다.
문제는 작은 연결지점, 즉 비닐고정 면과 줄로 붙들어 매는 곳이 두 곳씩 겹쳐 있기에, 그곳을 어 떻게 처리하고 그려내는가 보다도, 용접 작업을 진행할 기술자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었다. 용접기술자는 이해가 안 되니 자꾸 자신의 생각대로 바꾸고 싶어 했다. 초 겨울부터 재료를 구입하여 파이프를 휘고 용접하는 일을 전문기술자에게 맡겨 진행했다. 당시만 해 도 파이프가 도금되어 나오지 않았기에 모든 작업을 마친 후 녹슬지 않도록 칠을 두 차례나 했다. 품 이 많이 들었다. 겨울이라 그런 건지 쇠파이프에 바른 것이어서 그런 건지 잘 마르지도 않았고 운반 할 때마다 계속 옷에 묻어댔다. 문제는 2년 쯤 지나고 나니 모두 녹이 슬어갔다는 것이다. 비닐하우 스 제작을 끝내갈 무렵 도금된 파이프가 팔리고 있지 않은가! 한 해만 늦게 시작했더라면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때의 열정과 집중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고 여겨졌다. 3월 전에 골조를 세우는 작업을 하려고 땅에 구멍을 뚫는 기계, 얼음을 뚫을 수 있는 기계를 구입했으나 문제는 얼어있는 땅에는 전 혀 먹히지가 않았다는 점이다. 땅을 파서 묻으려는 계획을 접고, 잘려진 쇠파이프를 언땅에 박고 이 중으로 연결될 휠 파이프로 용접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더니 훨씬 일의 속도도 빨라지고 옆면수평을 맞추는 것이 용이했다.
비닐을 씌워 본 경험이 없어 봄바람이 조금 부는 날, 사람이 많아도 역부족이었다. 불가능했다.
씌우기도 전에 일부분이 바람에 날려 주변 철망에 걸려 애를 먹었다. 봉사 차 온 학생들이 많아 가능 하리라 생각했으나, 이것은 사람이 많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기술자의 제안으로 펼쳐진 비닐을 좁게 접고 말아서 세워진 골조위에 고정하는 작업을 마저 진행할 수 있었다. 4년이 지난 후, 비닐 교체 작 업을 할 때는, 좋은 일기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단 두 명이 모든 일을 진행 할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야채 재배를 실험하는 몇 년의 기간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2월에도 낮에는 온도가 급상승한다. 첫 겨울을 보내며 비닐을 안쪽에 한 겹 더 이중으로 설치한 후 하우스안의 온도 를 살펴보았다. 밖의 최저기온은 영하 27도, 이중비닐 안에는 아무 난방 없이 영하 7도였다. 밖의 기 온보다는 20도 가량 높은 온도이지만 난방을 하지 않고는 더 이상 온도를 올리는 것이 무리였다. 이 추운 곳에서 난방을 하여 야채를 재배해도 잘 자랄지는 의문이다. 난방비용도 엄청날 것이고, 결국 겨울(11월~2월) 기간은 하우스 농사를 진행하는 것이 무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비닐하우스 실 험을 통해 추운 이곳에서, 연 중 단 4개월 가능한 채소 재배를 8개월로 연장할 수 있음이 큰 소득으 로 여겨졌다.
첫 비닐하우스의 비닐은 1년 4계절을 계속 씌운 상태로 4년을 지내다 보니 비닐이 바람과 햇볕 에 구멍이 나고 낡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농사를 하지 않는 겨울에는 물을 주는 일이 없기 에 겨울을 보내며 하우스 안의 땅이 너무 마르는 것이었다. 하우스 전체를 쉽게 개폐할 수 있는 구조 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보온이 불필요한 여름철 모두 열어서 자연의 햇빛과 비를 받아들 이고 봄, 가을 온도조절을 위해서 비닐을 덮도록 한다면 비닐 수명도 두 배로 길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어 2차 비닐 작업은 좀 보완하여 전체를 쉽게 열고 닫도록 하였다. 이곳은 겨울에 북서풍이 강하 게 불고 봄철에는 돌풍과 강풍이 많다. 어느 해 봄, 회오리바람으로 비닐하우스 북 쪽 면을 감아올리 도록 고정한 42m 길이의 용접된 파이프가 통째로 수십 미터나 날아가 버렸다. 물론 고정용 끈은 다 끊어졌고, 파이프에 비닐을 고정하는 캡들 역시 주변 수십 미터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계사 와 돈사가 안 날아간 것을 보니 토네이도 보다 좀 약한 바람이었나보다. 비닐 한쪽 끝은 여전히 천정 면에 고정되어 요란한 소리를 내고 펄럭이고 있었다. 회오리바람 사건을 계기로 그해 여름부터 비닐 하우스를 보완하여 가을 서리오기 전 새롭게 씌운 적이 있다.
- 생명농업 사역의 보람과 사역 자립 이야기
1) 시작하며 기대희망 3년, 더 깊은 나락으로 3년, 다시 시작하기 3년, 어느 순간 다가온 기쁨과 보람, 감사와 행복!
‘5~6년이 지나면 자리가 잡히지 않을까?’ 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시작했던 생명농업 사역은 3년 이 지나며 운영비 부족의 압박으로 다가왔다. 6년 째 되던 해 여름 가금 콜레라의 발생으로 산란 중
인 양계 폐사로 이어지고, 오랜 시간동안 구축된 직판 소비자 200여 가정에게도 죄송함의 통신문을
발송하고 막을 내렸다. 이듬해 양돈 부분에도 염중독 증세로 어려움을 겪다가 돈사 보수의 필요성 때문에 양돈사업도 멈추어야 했다. 재정은 물론 막연한 자신감도 간 데 없고 간절한 기도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온 몸과 입술로 ‘아버지!’를 부르며 지나간 시간들이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에 서 비고 빈 마음으로 입술을 티끌에 대는 시간들을 통하여, 생명농업 사역에 대하여 주님께서 주시 는 새로운 관점의 생각들로 정리되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를 하도 부르니 하나님께서 답답하셨나 보다. 어느 날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생각할 힘 을 주시고 깨달음으로 교훈을 주셨다. ‘그래! 그런데 너는 어찌 꼭 돈으로 바꾸어서 선교하려고 하 니? 너는 생명농업의 농산물이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의 품질이고, 오염이 덜 된 깨끗한(심지 어는 거룩한) 먹거리 라고 강조하는데, 그것을 팔아서 꼭 돈으로 바꾸어 선교하려는 이유가 있느냐?’
– ‘네?… 아! 그렇네요. 생명농업을 통하여 생산된 먹거리는 모두에게 필요하고 환영받을 만한 것이네 요. 돈이 있는 사람들은 사먹을 수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눈길조차 줄 수 없는 것이네요. 그러 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 ‘다 알면서 뭘 묻냐? 네가 수고한 것, 너의 땀과 기도, 눈물과 온 몸의 힘이 들어간 그것으로 선교하면 되지 않겠니?’ 내 마음의 생각 속에서 일어난 주님과의 이 대화 이후 에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소망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 의욕이 새롭게 솟아나기 시작했다.
2) 주님의 깨우침과 함께 시작한 사역 방식의 전환
그 후 다시 처음 시작할 때의 규모까지 가는 데 또 다시 2~3년이 걸렸다. 우리가 생명농업 사역을 시작한 몇 년 후부터 우리의 사역비를 후원하기 시작했던 후원교회는 그때 “농업을 통한 선교”에 대 해 납득하지 못하는 당회로 인해 교회적인 지원이 어려웠지만, 담임 목사님의 개인적 참여와 후원이
큰 격려와 힘이 되었다. 주님의 깨우침 후에 생산된 농산물을 다 팔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
롭게 되었다. 생산된 것들 다 팔게 해달라고 기도로 조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팔리는 만큼 농장의 사 료비와 운영비로 사용하고, 모자라면 급한대로 생활비를 사역비로 전환하고 마음 편하게 풍성히 나 누기 시작했다. 새로 시작한 계란 생산의 십일조를 우선 나누었다. 그리고 남은 농산물은 하늘창고 에 쌓기로 했다. 그리고 생명농업 정신을 따른 농산물의 적정 가격을 생산자 입장에서 자율적으로 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농산물의 유통기한은 짧기만 하다. 겨울이나 봄과 가을에 계란은 온도와 습도, 알의 상태에 따 라 편차가 있을 수 있으나, 실온에서 6개월 까지도 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계란흰자위의 신선도 는 1달 이내이다. 그것도 여름철은 길어야 10일 정도이다. 이전에 좀 싸게 구입했던 중고 저온 냉장고 는 전기는 돌아가는데 성능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버리지는 못하고 잡동사니 서랍으로 사용할 수 있
었다. 농장에서 생산되는 계란을 나누어야 될 곳은 이전에 나누던 곳을 포함하여 점점 많아지기 시
작했다. 달라진 것은 팔리지 않아서 나누기 보다는 주기 위하여 계란을 모아야 했고 시간을 정하여 나눔이 진행되었다. 고아원 몇 곳, 경로원 여러 곳, 장애인 기관, 신학교들, 농장이 있는 시골 동리 어 르신들과 강 건너 사는 동포들에게 정성을 다해 나누었다. 특별히 고아원 1곳과 신학교 1곳은 그곳 에 있는 학생들이 매일 계란을 1개씩 먹을 수 있도록 공급했다. 먼 곳에서 온 신학교의 학생들은 정 해진 1달 분량을 맞추어 먹었으나, 강 건너 여인들이 낳은 아이들은 1달 분량이지만 보름 정도면 다 먹었다. 이 특별한 곳 학생들의 단백질 보충을 위하여 하루에 하나는 부족하게 생각되어 계란 생산 량이 늘어난 이듬해부터 1일 2개씩 공급하려는 마음을 가졌던 해 12월, 공안의 연행과 밤샘심문, 몇 차례 보충 조사 후 추방으로 이어져 실행하지는 못했다. 이 나눔의 시간들에 우리는 감사했고 기뻤 고 보람으로 인해 행복했다. 물론 이때 다른 농산물들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추방이 확정되고 남은 한 주간의 기간에 농장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가정교회 지도자에게 넘겨주는 이전 및 공증작업을 마 무리했다. 새로 알을 낳기 시작한 닭들과 함께 이듬해 농장 부지 사용료와 운영경비 등 5백만 원 정 도를 운영경비로 남겨주고 떠날 수 있음도 감사했다.
3) 부족을 벗어나고 여유로움이 시작되는 시점과 운영자금 및 생산량 규모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여 3년이 되어가는 해(생명농업 사역 9년 차), 어느 시점부터인가 재정에 대한 부담감이 나도 모르게 사라졌다. 농장에 필요한 작은 일들을 하나씩 진행할 수 있는 여력이 생 기기 시작했다. 10년 차 부터는 운영자금이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까 년 간 운 영계획의 그림이 더 분명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작은 농장에서 년 5천만원 정도의 총 수입이 있었고, 그중 47~48% 정도가 사료비와 인건비를 포함한 총 운영경비로 들어갔다. 남은 절반 정도가 남은 것 이었다. 이듬해를 위하여 년간 지불해야 하는 토지사용비용과 사료용 옥수수 구입비용을 제외한 절 반의 생산량은 선교를 위한 나눔으로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므로 하늘창고에 쌓였다. 주님의 가르침 을 따라 믿음과 사랑으로 수고하고 땀을 흘렸던 나날들은 매일이 감사가 되었고 기쁨이었다. 공안이 들이닥쳐 연행되기 두 주 전쯤 좀 늦었던 추수감사주일 예배 모임에서, 각자가 나누었던 감사의 제목 들 중 내가 나누었던 첫 번째 감사의 제목은 ‘매일 새벽을 기대와 의욕과 설렘 속에서 맞이했고, 날 이 저물 때에 내 가슴 속에 파고드는 쉼에 대한 기대와 만족이 가득한 나날들을 보내는, 은혜를 누리 게 되었다’ 는 내용이었다.
- II. 생명농업의 현장고민에서 출발한 선교적 과제와 의미들
이제 생명농업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명농업을 통해 얻은 선교의 가치와 의미들은
무엇인지, 지난 30년간의 현장 사역을 중심으로 지난 20여 년간 집중했던 생명농업의 과정에서 고민
하며 느낀 부분들을 선교적 혹은 선교사의 시각에서 정리하고 마무리 하고자 한다.
- 생명농업이란 무엇인가?
1)방법적인 내용보다 먼저 본질적 의미를 찾아본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거니와 먼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만물의 물질세계를 믿음으로 받 아들이는 믿음의 농업이다. 또한 그 창조세계 안에 깃든 물질과 생명체들의 균형과 조화를 보고 배 워 수용하며, 창조주의 뜻을 따라 관리해 가는 것이다. 즉, 물질과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찾 아서 순종 응답하는 농업이다. 그러기에 인간 생명과 생존의 기반이 되는 지구의 생태적 환경과 토양 을 어떻게 빌려 쓰고 가꾸며 관리해 갈 것인지를 체득하는 현장이며, 본래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다시 발견하여 사람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 원한 생명과 그 풍성함을 믿고 소망하도록 하기 위하여, 오늘의 실존에서 보고 누리게 하신 하나님 께서 주신 삶의 자리, 즉 하나님께 이어진 인간의 생명적 삶의 현장이다. 생명농업은 단순히 농업의 어떤 기술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생명농업은 영원한 생명, 풍성한 생명을 받아들임에 서 출발해야 한다. 나아가 건강한 삶의 이로움을 되찾고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생명적 가치의 방향 성에서 그 본질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명 농업은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농업이며 회복의 농업이다. 생명이시며, 생명의 창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농업이며, 그분을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농업이다. 세상이 주는 욕심과 탐욕의 부추김을 추종하는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농업이고, 생명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 돌아섰을 때 가능해지는 농업이다. 생 명은 우리의 수고와 경영으로 벌어 쌓아놓으므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께로부터 우리에게 온 것이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 하는 믿음의 농업이다.
나아가 생명농업은 주님의 뜻, 즉 생명을 살리시고 회복하시려는, 그 생명을 나누고 누리게 하시 려는 그 뜻을 따라 순종할 때, 즉 순종적 실천으로만 풍성함을 얻고 누릴 수 있는 농업이다. 이 순종 적 실천은 무엇인가? 표현을 달리한다면, 사랑이다. 따라서 생명농업과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으로 하는 농업이다. 가정 행복의 원리, 목회의 원리, 선교의 원리가 이 생명농업의 원리이 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명령 따라 이웃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동식물들, 가축도, 작물도, 환경도 땅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사랑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농업이고, 사랑으로만 잘 할 수 있 는 농업이다. 사랑으로 하는 것은 기술로 하는 것보다 더 낳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생명농업의 현장 사례로 설명해 본다. 농사의 일에 뭔 사랑이 필요할까? 사랑은 관심 과 보살핌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열정을 주어 지속할 힘을 갖게 하고, 수고와 희생이 기쁨이 되게 한
다. 다래생농원을 시작한 후 얼마 안 되어, 인근 지역에 현지 교회가 세운 경로원이 설립되었다. 은퇴
하신 권사님이 초대 설립 원장으로 수고하셨고, 그분은 나의 사역 초기에 알게 된 분이었다. 경로원 은 옛날 그 지역의 소학교 자리였다. 폐교된 소학교건물과 터를 구입하여 개축하여 경로원을 세운 것 이다. 장소가 넓었다. 경로원에 계신 분들이 축구할 것도 아니고, 운동장의 반만 채소밭으로 바꾸어 도 유기농을 능가한 생명농업의 야채공급이 이루어질 것이다. 작은 농장을 경영하도록 조언했고, 그 조언을 잘 받아들여 주었다. 그곳에서 2차례 교육을 했고, 다섯 칸짜리 계사1동 돈사 1동씩 지었다. 경로원에서 나오는 잔반은 사료화 했고, 생산된 계란은 경로원에 공급하고 남으면 팔아 사료 값에 보 태기로 했고, 축사에서 나온 좋은 유기질 퇴비를 활용하여 채소농사를 짖게 되었다. 연세가 많지만 열정이 있으셨다. 진행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전화로 질문하여 20~30분씩 대답해 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분명히 기술적으로는 먼저 배워 실천하고 가르쳤고, 또 계속되는 전화문의에 대 답하는 것을 본다면, 내가 한 수 위에 있음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양계사양을 통한 생산의 결 과는 기술을 지도했던 내가 몇 수 밑에 있었다. 그 권사님의 농장이 평균 산란율에서 30%정도 높았 기 때문이다. 곰곰이 고민한 결과 그 권사님은 배운 그대로 순종하며 실천했다. 그리고 지극 정성으 로 보살피고, 애정을 갖고 관리했던 것이다. 다래생농원은 이 부분이 부족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생명농업은 지음 받은 생명세계의 세밀한 순환 질서에 바르게 응답함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균형과 조화의 지혜가 필요하다. 이것은 크게, 넓게 보고 사랑하는 기술이요, 지혜이다. 더 큰 사랑을 향해가야 바르게 되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큰 사랑은 마땅히 공의롭다. 이 균형이 깨어지면 생태계도, 인간의 경제계도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2) 생명농업에서 사용되는 기술과 방법들
생명농업을 기술적으로 본다면 생태농업이요 친환경 농업이다. 유기농업, 자연농업, 지속가능한 농업에서 활용하는 다양한 기술과 농법 등을 생명농업의 가치와 목적의 방향에서 활용한다. 창조세 계 안에 감추어진 보화들을 찾아 발견하고, 부딪치는 문제와 난관을 극복해가는 지혜와 슬기로움의 지식이 필요하다. 농업은 생명의 분야이고 생명유지를 위한 먹거리 양식의 분야이다. 그러므로 생명 과 건강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종속되는 탐욕과 수탈의 농업을 단호히 배격한다. 유기질 비료를(인분, 축분, 농작물의 잔해물) 땅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양계에서는 자연 농업이 빌려온 일본의 “야먀기시즘 농법”의 양계방법을 이용한다. 그리고 미생 물의 도움을 통해 미생물 농업, 특히 자연농업의 조환규 선생이 강조하는 토착미생물을 활성화시켜 사용하는 농업을 사용한다. 흙과 미생물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호기성 발효, 혐기성 발효의 각종 기
술들을 농업에 이용한다. 산과 들에 있는 야초들을 농업의 동반자로, 귀중한 재료로 활용한다. 이렇
게 수많은 재료들과 방법들을 사용하지만,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인간 중심적으로 만 들어진 화학 비료, 농약(살충제, 살균제), 제초제(살초제) 등이다. 그리고 가축에게는 성장이나 생산 증식을 위한 호르몬제를 사용하지 않고, 환경의 불균형으로 야기된 질병들을 막기 위해서도 항생제 등은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극히 제한하여 사용한다. 가축의 생존과 건강을 위해 최소한의 예방접 종을 실시하고, 연 1~2회 구충제도 먹인다. 사용하는 다양한 농법과 기술들, 사용하지 않거나 절제 하여 사용하는 재료와 기술 등 모든 것들은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취사선택을 하게 된다. ‘생명에 유 익한가?’, ‘사람의 건강과 행복에 이로운가?’,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로운가?’, ‘사람만이 아니 라, 생태환경 전체에 유익한 것인가?’, ‘생명세계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리는 것인가?’, 아니면 ‘회복시 키고 관리해 나가는 것인가?’ 이처럼 다양한 기술 방법들은 ‘생명적 관점’에서 선택하는 것이 생명농 업이다.
3) 현 상황의 문제점 인식
가축의 생존권을 논하는 시대이다. 동식물의 환경은 우리의 생명과 유기적 관계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독감이 와도 전염병이 와도 반경 몇 km안의 사람은 모두 살 처분 매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가축에게는(조류독감, 구제역…) 그렇게 무참히 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신학적 반성이 일어나야 할 부분으로서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대한민국은 가축학살을 합법 화 정당화 하는 모델국가가 아닌가? 모든 활동과 행위의 초점이 왜곡된 시장경제 가치의 관점에서 돈 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생명농업은 탐욕에 근거한 돈벌이의 수단이 되 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생명농업이 경제를 초월했거나 경제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생 존을 위한 식량과 건강한 식문화가 걸려있는 경제 흐름의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농업 분야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변함없이 경제계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 생명 농업의 선교적 가치와 의미들
1) 선교의 영성회복을 위한 선교사의 영성 훈련장
비록 교회 중심의 목회와 선교 현장이 아닐지라도, 생명농업은 선교사의 영성개발과 영성유지를 위한 최고의 환경이다. 그렇다고 생명농업의 환경이 좋은 호텔처럼 편안하고 쾌적하고 깨끗하고, 춥 지도 덥지도 않고, 필요한 서비스가 모두 갖추어져서가 아니다. 어쩌면 정반대일지 모른다. 오히려 하 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숨결을 늘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일기가 변화무쌍하다. 찬 바람과 폭설의 겨울도 있고, 따뜻한 햇볕이 길어지는 봄날과 촉촉이 내려주는 봄비로 깊게 얼었던 땅속이 녹아들고 온갖 식물들이 싹을 틔우며 생명의 기지개를 펴는가하면, 갈피를 잡기 힘든 돌풍 이 불어 대지를 말갛게 쓸어주기도 한다.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길어진 태양 빛의 뜨거운 열기를 온
몸에 받아가며 김을 매야 한다. 무더운 여름의 날들, 장마 비로 질척거리는 땅들, 폭우로 인한 사고들,
선선한 가을이 간절해질 때 성급한 코스모스가 꽃을 피워 가을을 미리 보게 한다. 고추잠자리들이 날아다니며 어린 시절 행복을 되새겨 보게 하고, 햇볕이 따가워지면 빨간 고추와 함께 가을이 된다. 어느새 바람이 차가와지고 누런 콩잎이 떨어지면, 서리가 오고 가을이 깊어간다. 농부의 손발은 바 빠지고 남국의 햇볕은 점점 짧아진다. 어느 시인의 기도처럼 남국의 햇볕을 조금 더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추수를 마치고 눈 내리는 겨울을 맞으면, 그 눈은 너무 포근한 솜이불이 된다.
창조세계의 기후 변화는 인간의 안주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생명농업의 현장은 늘 긴장하게 하 고 더욱 기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응답하심에 감사드리고, 감사하며 기쁨을 누리게 한다. 제초제 뿌 리면 끊어지도록 아픈 허리의 통증을 어디서 맛보랴! 추수의 즐거움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체력 고갈의 비고 빈 몸과 마음이 될 때 오는 것임을, 어디에서 이처럼 진하게 체득할 수 있을까? 온몸으 로 맞아들이는 음식의 맛을 어디에서 누릴 것이며, 깊은 단잠으로 새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보통 일인가! 우리의 영성을 일깨우고 영성을 유지시켜 주는 현장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일하시는 하나님, 지으신 지구와 우주를 오늘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을 본다. 그분의 은혜주심 힘입어 살아가는 내 발 밑, 흙 가운데 펼쳐지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부지런 한 생명활동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생명농업의 현장은 알고도 실행하지 못한 것들을 절실히 깨닫게 만 드는 회개의 현장이다. 머릿속으로 환히 알고 있다고, 그것을 남에게 가르치고 그 이론과 기술을 전 달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는 대로 실천해야 열매가 맺히는 것을 눈으로 목도하는 현장 이다. 심은 대로 싹 나고 거두게 된다는 것을 보고 체득하는 현장이다. 자랄 때는 비슷해 보여도 열매 를 보면 구별된다.(메주콩과 서리태, 팥, 녹두, 강낭콩, 완두콩), 시간이 지나가면 서서히 본색을 드러낸다. 자기의 때와 시기가 정해져 있다. 너무 앞서 갈 수도 없고, 뒤쳐져 특수 관리를 받는 것이 간증은
될 수 있는지 몰라도 모델은 아님을! 어디에서 이처럼 본색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며, 나도 그 안 에 있는 자임을 체득할 수 있을까?
생명농업의 현장은 창조세계에 자신을 비추어 보게 하는 거울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 자신을 이 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매일 변화고 바뀌는 존재임을 보게 만드는 거울이라는 말이 다. 또한 모든 생명농업의 현장은 다양한 인생과 삶의 모습들을 깊이 보고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반 추하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노동의 현장에서 그것도 오랜 시간을 함께 먹고 일을 하다 보면, 사람 을 깊이 알아가게 되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나를 보게 하시려고! 나를 빚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일군들이 거쳐 가게 하셨는가!’
생명농업의 현장은 온몸으로 하는 묵상의 현장이다. 즉 노동과 묵상이 하나로 이어져 영성의 균
형은 유지하는데 최상의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의 역사에 나오는 수도원의 ‘노동과 묵상’이 그래서 필요했나 보다! 라고 느끼게 된다. 이 시대의 모습이 권력과 재물을 의지하고 추구했 던 그 시절과 너무 닮아서일까? 도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삶의 가치들을 찾아내고 실천하 는 개혁을 위해서, 생명 농업의 현장은 영성훈련장으로의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영성훈련’하면 아주 고상하게 생각하고 느낀다. 형이상학적인 영성을 수련하는 것이 니, 환경도 조용하고 깨끗하고 세속에서 떠나있는 절간의 수도승을 연상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신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 아닐까? 그런데, 요즘 교회 는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생각 속에 이미지화해서 묵상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십자가는 몸으로 짊어지는 것이고, 내 몸과 힘으로 도저히 지고 갈 수 없는 형틀의 실제다. 십자가 영 성은 예수님처럼 내가 매달려 죽는 것, 즉 ‘내가 죽는 것’이다. 내 자신의 힘과 인내로 감당할 정도의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이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 로 되도록’ 나를 죽이는 것이요 나의 모든 것을, 육신의 생명까지도 내려놓는 것이다. 십자가의 영성 은 상식적인 ‘고상함’의 수준의 차원이 아니라, 너무 힘들고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죽음과 고통과 두 려움의 실제이다. 이처럼 나의 뜻을 내려두고 내가 죽어지는 현장에 하나님의 뜻이 부활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그리스도교의 영성이다. 그렇다고 내가 예수님처럼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 매고 가 거나, 손에 못을 박는다고 해도 그것은 퍼포먼스나 연극은 될지라도 십자가 영성이 될 수 는 없다.
또한 영성훈련이 현대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심신을 쾌활케 하기 위해 추구하는 기분전환용 특 별 프로그램이거나, 참신한 즐거움을 되찾으려고 하는 수련의 과정은 더더욱 아니다. 힘든 노동의 삶 이 연속인 생명농업의 현장은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고 있지만, 인생의 삶이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현 장이기에,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지으신 세계에 속한 인간 본연의 역할과 사명이 함축되어 있는 곳이기 에 영성수련의 조건들을 골고루 갖추었다고 여긴다.
2) 선교적 접촉점 형성과 성육신적 현장화의 장
생명농업은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이며, 또 생명지향적인 인류미래의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교현장의 사람들과 직간접 연관성 을 갖고 있다. 농업의 일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농업으로 생산된 먹거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 문이다. 생명농업은 생산자 농민이거나 그 먹거리를 소비하는 소비자로 확대되고 연결되어진다. 유 통과 판매라는 사업의 현장과 일터를 매개체로 더 많은 소비자들의 생명과 건강 행복의 삶으로 확대 심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특히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선교를 금지하는 나라들에서 대상을 찾아가는 현실적 이유이고, 대상을 불러 올 수 있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더욱이, 내용적으로도 복음적인 생명의 가치가 녹아 있고, 복음을 필요로 하는 선교지 사람들
의 생명과 생존에 관한 중요한 관심사가 거부감 없이 만날 수 있는 공통지점으로서, 선교적 접촉점 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경과 종교와 문화를 뛰어 넘는 경제활동의 분야 중에서도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 행복이라는 현실적 추구의 방향과 긴밀히 연결된 분야이기에, 선교지의 특수한 문화를 사려 깊게 고려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아이템과 분야로 그들의 삶과 세계에 깊이 침투해 들어갈 수 있는 전략적 방법이고 선교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플랫폼이다.
현대의 세분화된 교육의 과정과 분야별 전문화 현상의 영향이 신학교육안에도 들어왔다. 자연스 럽게 이러한 전공직업과 삶의 구조에 익숙해진 목회자나 선교사들의 삶과 생활 테두리는 넓은 듯 보 이지만 그것은 당사자들의 착시현상 일뿐, 목회라는 또는 선교라는 한 분야에 좁게 갇혀 있을 뿐 아 니라, 자신의 전공과 전문분야별로 더욱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영역 은 세분화 되어진 것 중의 하나이고, 그만큼 생활의 폭, 즉 삶의 현장이 특정한 공간을 중심으로 고 정되므로 특정한 삶의 스타일로 굳어간다는 사실이다. 이런 테두리의 한계들을 돌파할 수는 없는 가? 또한 불신자가 복음을 들고 믿음의 생활 영역인 교회당 중심의 생활로 들어온 후, 시간이 흘러 갈수록 믿음 이전의 삶의 자리와 멀어질 뿐 아니라, 삶의 문화적 양식이 아주 달라진다. 차츰 교제권 이 바뀌고 어울리는 사람들이 교회안의 사람들로 바뀐다. 교회라는 특수한 교제권 안으로 들어오 는 것이 분명 잘 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특수구조 안에 갇히게 만들어, 일반 사회와 분 리현상을 나타내다가, 교회가 힘이 생겨지면 일반 사회를 소외시키는 병적인 모습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그런 병적 구조에 갇히고 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 교회라는 구조 안에서 기독교의 복 음과 선교를 가로막는 내재적 장애이다. 교회공동체 내부 안에 형성되어 자라나는 병리적 모습이다. 신앙생활이 실생활로 이어져 생활 현장에서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신앙의 관계 구조 가 모이는 교회(예배당 중심의 신앙 활동)로만 치우쳐 흩어짐의 삶, 즉 일터와 생활 현장에 녹아들어 가지 못하고 겉도는 존재, 쓸모없는 존재로의 종교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교회 스스로가 교회라는 특수구조에 갇혀 버리면 참교회의 본질을 잃게 된다. 세상의 빛과 소 금이 되어야 하는 선교적 존재로의 교회의 본질적 사명 수행이 퇴색되다가 급기야 교회가 변질되고 자정능력을 상실한 채 몰락해 버리는 수순을 지금 한국 교회가 따르고 있지 않나? 우려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복음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복음 증거의 현장을 너무 도외시하거나 방관했던 지난 과거 의 산물일 수도 있다. 모이는 교회에만 전력투구 했던 것이 재정적 힘과 권력을 가진 교회로 공룡화 하다가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는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면 너무 심한 평가일까! 흩어지는 삶의 예배, 일터와 가정에서 교회의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복음으로 드러나는 교회의 선교적(존 재적) 본질회복이 절실히 필요 한 때이다.
신학과 선교학이 학문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벌써 그 맛을 잃은 소금과 다를 바가 없다. 복음이
필요한 세상 속에 들어갈 날선 검이어야 하고, 잃어버린 삶의 자리를 되찾아 내는 실천적 이론이요, 능력 있는 논리여야 한다. 이렇게 무장된 복음의 일군들이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소유자로, 믿을 뿐 아니라 지키는 자로, 그리고 증거공동체로의 본질적 회복, 구조적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세 속적인 삶의 자리로 과소평가하며, 영적이라고 여겼던 교회 안의 활동들과 비교하여 물질적인 세계 로 평가절하 했던, 이원론의 그림자들을 속히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일군들로 사회 요소요소의 직업과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의 삶 을 살아내도록 하기 위해,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갇혀있는 목회전문인, 선교사역 전문분야에서 해 방되어 삶의 자리로 나가야 한다. 선교의 대상이 있는 ‘삶의 자리’, ‘사업의 자리’, ‘직업의 자리’로 성육 신하자는 것이다. 사도들이 말씀을 맡은 자였다고 세속의 삶을 몰랐던 자들이었나? 그렇지 않다. 다 양한 분양의 인생 경험을 통해 인생의 고민을 알고 있는 삶의 무거움을 겪었던 자들이었다. 사도바 울도 천막을 짜는 숙련된 기술자였다. 자신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생계를 자신의 손으로 천막을 짜 서 벌어 유지해가며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갈 곳이 없다고! 선교학을 공부한 선교사들이 왜 갈 곳이 없겠는가! 수도 없이 많은 분야의 일자리들이 열려 있는데 말이다. 일터와 삶 의 자리는 다시 강조하거니와 선교적 접촉점이다. 나아가 성육신적 현장화의 자리이다.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언은 선교사가 성육신적으로 현장화 되는 것이다. 눈높이가 같아지고, 삶의 모습도 비슷해 지고, 그렇게 될 때 이해하게 되고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 관계와 소통의 통로로 복음이 나누어진다. 나아가 깊이 존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여러 가지 체제와 문화와 사회의 구조 속에서 이 일은 그 렇게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분야에 아직도 열린 문이 많다. 생명농업의 장도 그중의 하나이 다. 좀 힘이 들어서 그렇지, 아주 깊이 현장화 할 수 있는 사역의 장임에 틀림없다.
특히 중국의 경우 현재 정부의 가장 큰 고민은 빈부격차의 심화이고, 그 안에 3농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중앙 정부와 지방정부의 고민이며, 경제개혁개방을 선택한 사회주의시장경제의 모순과 아 픔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생명 농업적 접근은 국가와 사회가 안고 있는 숙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 이고, 그 곳에서 바른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며 복음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래 생농원의 목표중 하나였다.
3) 가치의 전환과 선교적 교회 세우기의 실천장
현대인의 최고 가치는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머니’인 것 같다. 돈 많이 벌어 쓰는 것이 가장 보편화된 가치가 아닐까? 그것도 힘들이지 않고 일하며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닌가? 돈이 있으면 권 력도, 명예도, 인간의 욕망을 모두 얻고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 만능의 가치관이 대세이다. 이념으로 나뉘어졌던 가치들이 이제 자본위주의 시장경제로 통합되어 있는 듯하다.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고 종교와 문화를 넘어서고 정치 이념과 스타일을 모두 뛰어넘어 하나로 통폐합된 자본주의 의 경제물결은 ‘시장 경제’라는 그럴 듯한 이론으로 극단적 경쟁을 부추기고 합리화하며, 정글의 법 칙을 들먹이며, ‘양육강식’의 논리가 당연하듯 위장하므로 거대한 ‘맘몬 괴물’을 키워내고 있다. 결과 적으로 현대인의 보편적 가치는 ‘맘몬’의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는 정치와 경제, 사회, 교육, 문화와 종 교계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고, 복음을 가진 교회마저 맘몬가치에 잠식되어 가치의 혼란을 빚고 있음 도 사실이다. 복음 가치를 상실한 채, 맘몬가치가 마치 복음의 최후열매인 양, 마음껏 그 안에서 누리 며 안주하는 교회는 이미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교회가 어떻게 다시 복음 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최고 가치를 물질 기준의 가치에서 복음이 말하는 생명가치로 전환해 야 한다. 생명가치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뜻이 절대적인 기준이며, 그 뜻을 따라 생명을 회복
시키고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최고의 가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 여 받은 생명을 이 시대와 상황 가운데 나누며 누리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가치 기준과 결정 의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말하는 생명살림의 가치, 생명회복의 가치로 가치의 기준점을 돌려 놓아야 한다. 생명 나눔과 진정한 생명 누림의 가치 회복이 필요하다. 약육강식의 극단적 대립과 경 쟁이 아닌 상생과 조화의 가치, 정직한 땀 흘림, 희생과 수고가 깃든 사랑의 가치, 믿음과 소망으로 모 든 시련을 이겨내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곧 생명의 가치이다.
생명농업의 선교 현장은 이러한 생명가치에로의 전환을 보고 깨닫고 체험하게 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물질세계를 부정하지 않지만, 물질 중심의 가치 구조를 넘어서는 생명가치의 정신이 흐르 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가치의 방향을 잃어버린다면 생명농업은 존속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선교 현장에 세우려는 교회는 어떤 교회여야 할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복음의 능력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그 사회와 모든 삶의 구조 속에 드러나고 증거되는 선교적 교회의 모습 아닐까! 그렇다 면 복음의 핵심이 선교적으로 표현되는 ‘생명가치’의 비전을 세우고 심어 세상을 회피하지도 않지만, 세상 속에 동화되어 그 가치를 상실하지 않는 교회여야 하고, 그 생명의 가치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적 교회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생명가치의 선교적 비전을 선교 현장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에게 심고 훈련하는 실천 장으로의 의미가 있다.
4)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한 대안적 라이프스타일 제시의 현장
현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생각해본다. 현시대의 큰 특징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급속한 도 시화의 물결이다. 많은 선교지의 나라들도 예외일 수 없다.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도시로 인구의 이 동이 급속히 늘어가고 있고 기존의 작은 도시들은 대형 도시로 그 규모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 이런 요인을 한두 가지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편한 주거환경은 우선 재정능력이 있는 자들을 도시 로 오게 하고, 도시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과정에서 많은 건축과 도로 사회기반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하기에 우선은 일자리가 많다. 급하게 변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열
린 기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돈을 많이 벌어야 살 수 있는 현 시대의 구조 때문이고, 그러한 구조 속에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오직 ‘물질 만능의 가치’가 중심 가치로 자리 잡 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삶의 자리에 있는 주변의 친구와 이웃들, 친척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면 그 흐름은 강력한 물결을 일으켜 성격적으로 소심한 사람들조차 도시로, 도시로, 돈벌이가 있는 곳 으로 떠나간다. 또, 정치적 목적과 계획에 근거한 경우도 있다.
이처럼 급속한 도시화는 막기 힘든 이 시대의 현재 모습이다. 도시화된 사회 구조 안에 사회학 자들이 말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주거시설의 부족, 물 부족, 환경 파괴와 쓰레기 공해, 인간관계 구조의 변화, 무한 경쟁으로 인한 빈부격차의 양극화, 도시의 어두운 그늘인 빈민층의 띠, 그리고 경쟁 사회가 보너스로 주는 극심한 스트레스… 등 머릿속에 쉽게 떠오르는 문제들이다.
맘몬의 위력은 참으로 강력하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가치구조를 통일시켰다. 그 리고 삶의 자리도 한곳으로 모아가기 시작한다. 균형이 깨어지기 시작하면 그 쏠림이 가속도가 붙어 심화되고 회복이 불가능한 고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맘몬’이 던지고 있는 매력은 모든 문제에 도 불구하고 맘몬 추구에 집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런 도시화 중심의 삶의 구조로 전환되면 사 람들은 그러한 구조에서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애쓸 수 밖에 없다. 부모세대의 땀과 노동 희생 을 통해 자녀세대를 조금이라도 나은 삶의 자리로 밀어 올리려 한다. 자녀의 교육에 집중하게 된다.
도를 넘어 수고와 노동에도 불구하고 수입의 한계와 빈부의 격차를 맛보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간다.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옛날에는 초등(국민)학교가 공부의 시작이다. 그러다가 유치원이 보 편화 되더니 이제는 3-4세 유아원 영재반이 있다. 이때부터 교육한다는 허울 좋은 구조 아래 경쟁구 조로 들어간다. 아니 이제는 아기씨가 엄마 뱃속에 자리 잡으면 벌써 그때부터 교육에 돌입하는 모 습들을 TV매체들이 보도하고 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똑똑하고 이기적이며, 영악한 인재로 빚어 져야 하기에 편히 쉴 틈이 없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태어나자마자 지독한 경쟁의 연속이다. 때 가 되면 뒤집고, 앉고, 기고, 일어서고 걷는 것을, 때가 되면 옹알이를 하다가 ‘엄마, 아빠’ 말하게 되 는 것을 현대인들은 조급하여 기다릴 수 없나보다. 빨리 자라게 하고 싶은가 보다. 키도 남보다 커야 하고, 몸도 건강하기를 원해서 온갖 영양식을 먹이고, 그래서 보기 좋게 튼튼한데, 나중에는 외모 때 문에 고민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잘 먹이려고 수고하여 스트레스 받았는데, 너무 잘 먹어서 스트 레스를 또 받아야 하는 웃긴 시대, 그러나 웃지 못 할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옛날에는 중학교 2~3학 년 끝에 사춘기가 왔는데, 요즘은 초등생들이 사춘기를 지내느라 안정이 안 된다. 빨리 자라라고 잡
아 댕겨 놔서 그런가 보다.
아무튼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초등생들이 학교 공부 뿐 아니라, 학원을 서너 곳 씩 뛰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이야기다. 중, 고등시절도 마찬가지로 밤과 낮이 구분도 안 되는 입시지옥 암 기훈련을 받는다. 대학에 들어가면 옛 시절에는 그래도 모든 것 내려놓고 대학이 주는 낭만에 젖어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물론 요즘도 있겠지만), 대학 역시 경쟁의 연속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졸업을 무서워한단다. 가능한 한 휴학도 하고, 유학도 다녀보고, 지독한 입시경쟁을 지나왔는데, 이제는 더 지독한 입사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그 자체를 누려야만 하는 체질로 되었고, 몸과 마 음의 유전자를 스트레스 체질로 변종시켜 새로운 품종, 즉 돌연변이 인간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학교 다니며 학원 서너 곳씩 뛰어다니게 만든 훈련은 자연스럽게 시급으로 정해진 아르바이트 인생 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아르바이트도 직업이긴 하지만, 하나 가지고는 생존이 불가능하여 두 세 곳 씩 뛰어야 하는데, 아! 이것도 그 잘난 훈련의 결과가 아닌가! 너무 일면만 꼬집은 것인가!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지 눈치 채신 분들이 있을 것이다.
경쟁에서 이긴 자들은 이긴 자대로 자신만만함이 주는 기쁨도 잠시일 뿐, 돈으로 평가되는 인생 의 진짜 경쟁에 이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경쟁에서 밀린 자들이 훨씬 많기에 그 다음의 경쟁의 과정 들은 셀 수 없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 인생의 비전도 꿈도 겸손해서가 아니라, 좀 비굴하게 현실과의 타협으로 내려놓는다. 직장도 찾고, 일자리도 찾고, 운이 좋으면 마음에 드는 짝 을 찾아 가정을 꾸리고, 그때부터 후대와 가정을 책임 질 현대인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이다. 자녀 들을 또 그렇게 낳고 교육시켜가면서, 자녀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고통이 부모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 는 법이기에, 스트레스 누적으로 몸과 마음에 각종 질병이 발생하고, 진짜 무심할 정도로 열심히 살 아온 자신에게 대한 최소한의 보답으로 조금 남은 돈을 병원에 바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인생의 꿈과 비전이 무엇인지,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돌아 볼 여유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짧아진 인생을 길게 잡아당겨 늘여 연명하는 또 다른 건강경쟁, 생존 경쟁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비슷하게 살아가면 마음이 놓이나보 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인생패턴)을 과감히 바꾸자는 말이다.
돈이 가치의 중심이 아니라, 생명이 가치의 중심이 되는 삶의 구조를 세워가자!
복음이 말하는 생명가치,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건강한 삶의 가치, 그 생명 안에서 풍성히 누리도 록 되어 있는 행복의 진정한 가치들을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세워나가자. 인류가 수천 년간 살아가던 창조세계 환경이 주는 삶의 자리가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그 삶의 자리를 버렸고, 그래서 하나 님께서 본래 인간에게 주신 삶의 자리를 잃어버렸다. 도시와 농촌 가운데 삶의 자리들이 다시 적절
한 균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미래의 수많은 창조적인 일자리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생명농
업 현장은 하나님 지으신 세계를 가까이하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생명의 가치를 따라 생명이 주는 풍성함을 나누며 누리며 사는, 현대인의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유일한 현장은 아닐지라 도 아주 좋은 현장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황폐해진 땅을 회복하여 가꾸며,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 실 은혜 안에서 아주 행복하게 땀 흘리며, 건강한 삶을 먼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므로, 그 삶의 자리에 깃든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가치인 ‘생명의 가치’들이 증언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농업의 현장 은 이러한 현실적 대안제시의 장임이 틀림없다.
5) 선교 신학적 성찰과 고민의 현장
현장과 현실의 문제를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그것을 죽은 신학이요 이론일 것이다. 더욱이 선교 신학은 선교현장과 현실의 실제 속으로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다. 경제 중심의 큰 현대 물결에 쌓여 거기서 허우적거리는 영혼들을 위해서라도 복음의 정신으로 그 현장과 실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말하는 것은 타인을 피곤하게 만드는 힘없는 변증에 불 과하다. 한국교회라는 목회구조의 틀에 갇혀 있으면 좀 힘들지 몰라도 그래도 용기가 있으면 가능하 다. 선교사는 현장의 삶, 선교지의 주민들의 현실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지 않으
면 도와줄 것도, 해줄 것도 별로 없다. ‘굿 뉴스’는 누가 ‘그랬다 카더라!’ 정도로는 실존적 의문에 대 한 해석도 증거의 능력도 없다. 내가 들어가 살아보고, 가슴 절절히 체득함으로 그곳에서 경험한 하
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그리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처절한 몸부림 가운데 들려온 주님의 말씀을 나누 어야 생명의 말씀, 복음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선교지의 언어나 문화도, 역사적 배경도 알아야겠 지만, 선교 현장의 실제를 더 잘 알려면, 현장으로 가서 살아야하고 그들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야 한 다. 생명농업의 현장 말고도, 다양한 삶의 현장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들어갈 삶의 자리를, 일자리를 찾아내고 성실히 그 자리에 머물고 인내하며, 몸으로 배워가며,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조차도 남 아있지 않다면 그 상태로 기다리면 된다. 물론 기도하며 기대하면서 말이다.
선교신학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현실과 현장 속에서 태동되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과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현실의 고통과 아픔이 주는 풀리지 않는 고민들 을 찾아내어 그들이 알아들도록 복음의 행위와 해석으로 대답을 주는 것이다. 목사라는 선교사라 는 직업 외에, 진짜 내게 주신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술과 직업을 최소한 하나 이상씩 준비하는 일 이 필요하다. 다양한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돈 버는 일을 한 번 전심전력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미 해본 경험이 있다면, 그분은 선교지에서 BAM사역을 위한 기초를 이미 다졌을 수도 있다.
나는 생명농업을 하면서 ‘생명경제’를 고민한다. 현재의 경제의 구조와 흐름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옳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가? 너와 나 그리고 모두
에게 유익한가? 나에서부터 출발하여 작은 우리만을 생각하는데, 더 큰 ‘우리’를 위한 모습으로 흘러 가고 있나? 그런데 아무리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여 보아도 아닌 것이 많다. 아직 아닌 것도 많다. 그러 면 어떻게 복음 안에 있는 ‘경제의 흐름’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생명의 경제’를 생 각하며 꿈꾸어 본다. 그리고 생명농업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몸부림쳐 본다. ‘생명의 정치’는 어 떻게 할 것인지, ‘생명의 문화’는 어떻게 꽃피울 수 있는지, 내가 속한 곳을 생명사회로 바꾸고 빚어가 는 것은 계속되는 나의 꿈이다. 나는 지금 연해주 생명농업의 현장에서 이러한 고민을 계속하며 나 자신과 이 시대를 돌아본다. 생명농업의 현장은 내게 ‘평생신학교’임에 틀림없다. 나를 빚어가는 곳, 선교신학적 성찰을 계속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6) 나의 생명농업 현장은 자립선교를 지향하는 자립사역 현장
선교사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기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언어와 문화충격은 시간이 지나가며 해소 되어 가는 면도 있다. 많은 경우 비자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는 선교지의 환경마다 좀 다르지만 전략 적 접근지역의 나라들 안에서는 계속 따라다니는 문제이다. 그리고 생활과 사역을 위한 후원금 문제 이다. 사역비까지 후원을 받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인 듯하다. 생활비 후원금조차도 끊어졌다 이어졌 다를 반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2000년대에 들어서며, 특히 2010년 전후로 이미 시작된 한국 교회의 교인감소와 더불어 재정의 압박이 선교비 감소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선교사들 에게 가중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 사태는 이처럼 뿌리깊이 잠재되어 있던 한국 교회의 위축을 표면화하는 좋은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한국교회가 감당할 하나님의 선교 는 어떻게 이어져 갈 것인가? 이번 모임도 이런 선교의 방향성과 전략을 모색하기 위함으로 여겨진다. 선교현장의 선교사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 생활비 후원금의 축소를 담담히 견디어 내고, 가 난한데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사도바울처럼 배우는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IMF 때의 필 자처럼 행동하는 믿음의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떠안고 병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열악해져 가는 생활 비 조건 속에서도 삶의 질과 생존율을 높이는 대안을 모색할 것인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초대받 은 선교사들이 생존 자립지수를 높이고, 나아가 사역을 위한 재정 자립율을 높이는 길을 모색하는 것은 이 시점에 필요한 선교적 행동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가 경험한 생명농업 사역을 여러 사역 대안 중의 하나로 추천하는 바이다. 필자 역시 평균이하의 생활비 여건 속에서 생명농업을 통하여 풍성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었고, 기쁨으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자립 사역으로 가는 길에도 분명 과정 이 필요하다. 누가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지 행동에 옮기는 결단과 초기비용도 필요하다. 현장을 만들 고 자리 잡는 시간도 필요하고 수고와 인내도 필요하다. 자립율이 서서히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
다. 사역자에겐 그 때까지 버틸 이유와 힘이 필요하다. 방법과 과정의 길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필자는 지금 러시아 연해주의 “이바나브까” 시골에서 지난 20여년의 경험을 되살려 다시금 생명
농업 사역현장을 세워가고 있다. 문화와 환경이 달라서인지, 상황적 변수는 늘 새롭게 다가오며 일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 곳에서 새롭게 ‘한알민 공동체’(생명과 평화와 선교의 공동체)를 꿈꾸며 현장을 세워가고 있다. 생명농업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응답하는 믿음의 농민들이 교회와 마 을과 연해주 지역 속에서 싹터 가기를 소망한다. 생명 농업과 관련된 기술교육과 더불어 농장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적정기술(작은 농기계 관리수리. 목조주택 건축 기술, 전기, 용접, 상하수도 설비, 냉난 방기 설치, 친환경 에너지 등)의 교육과 이와 관련된 각종 공구와 설비를 사용하는 훈련을 통하여 연 해주 지역의 현지목회자들의 재정자립율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므로, 자립선교의 방향으로 함께 나 아가도록 협력하고자 한다.
베트남 호치민시에서의 TENT-MAKING 접목사례 / 박종암 선교사(다리놓는 사람들)
1.베트남 선교환경
베트남(호치민시)에서 텐트메이크 선교 접목사례를 발표하는데 있어서 우선적으로 다뤄야 할 내용은 베트남 만의 독특한 선교환경이다.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설명 할 수 있다. 첫째는, 베트남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공산당 일당의 정치체제이다(정치). 둘째는, 1911년부터 복음이 전해진 정부가 인정하는 복음주의의 현지교회가 존재한다(종교). 셋째는 1993년 한. 베수교 이후 투자1위인 한국과 경제적인 긴밀한 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경제). 넷째는 중국문화와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한국과 베트남은 유사문화를 가지고 있다(문화). 이와같은 베트남 선교환경의 특징들은 베트남은 창의적 접 근지역이면서 텐트메이크 선교가 효율적으로 활용 될 수 있는 지역이다.
베트남에서는 외국인의 종교비자(한인교회 제외)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선교사들은 투자비 자를 통해 거주를 해결하고 있으며, 호치민시의 경우 한인지역에서 전통적인 선교에 참여하는 선교사 들도 자비량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다시 정리하면, 베트남은 정치적으로는 선교가 제한되는 창의적 접근지역에 속하지만, 경제,문화적으로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진 선교지이다. 이런 특징으로 “전통적
인 선교의 기반인 건강한 현지교회”와 “창의적 전략선교의 텐트메이커 선교사”들의 협업이 효과적으 로 진행된다면, 다양한 좋은 사역들의 모델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현장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 2. 다양한 자비량 선교의 시도들
TENT-MAKING 선교에 대해 IM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선교사 입국의 제한이나 선 교지 상황의 어려움에 따른 창의적 접근지역을 위해서 개발된 전략이다. 이는 전문인 선교라고도 할 수 있다. 2009년부터 시작한 베트남 문화예술사역으로 전문성있는 다양한 사역들이 시도되었다. 그 리고 대부분의 사역들은 현지교회와 협력하면서 비즈니스 구조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1) 콘텐츠물 앨범 제작과 유통사업
2) 문화예술 노엘 프로젝트 공연사업
3) 단기팀을 활용한 원더풀스토리 킴프를 통한 책 순환
4) 장기선교사 투자비자와 단기선교사 자비량 구조의 학원운영
5) 선교사 자비량 구조의 NGO(한국어와 한국문화의 대표기관 세종학당)
6) 미디어 전문가들의 현장 거점미디어 선교센터
- 선순환과 생태계의 구조!
위의 다양한 시도들은 베트남의 선교환경에 적합한 사역을 개발하기 위한 사역들이었다. 하나 님의 선교가 “닫혀 있는 것 같지만 열려있고, 열려있는 것 같지만 닫혀있는 환경”속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틈새를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실패의 시간과 아픔이 경험도 있지만, 늘 다가오는 새로운 도전을 맞아들이느라 정신없는 기간을 보냈다. 지금도 새로운 일을 앞두 고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늘 고민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 그리 고 계속 고민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그 사역들을 통한 빛과 소금의 역할이다. 일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여 탁월함으로 현지 인들에게 건강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다. 현장에서 전문성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사랑하 는 일의 중요성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일에서 멈춰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도 하였 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어떻게 사람을 키울 것이며 현지교회와의 파트너쉽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 는가가 생각하면서 사역하는 법이 중요하다는 결론이다.
둘째는 그 사역의 지속성이다. 모든 일을 시작할 수 있지만, 지속성을 가지고 확대 발전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 일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그 일을 통해 누군가가 도움을 얻고 협업으로 더 발전한 선교구조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예를들면, 수익구조의 선순환 그리고 협업 공유의 생태계(상호작용)가 함께 하는 선교사들과 그리고 차세대로 이어지는 선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시대가 급격히 변해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타문화권에서의 생존을 넘어서서 우리의 사역이 어떻게 지속가능한 구조로 계속되게 할 것이가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되어야 하며 그것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발제
박종암 선교사
한국 다리놓는사람들, 예능교회 공동파송 베트남 다리놓는사람들 공동대표
KWMA 문화예술선교 실행위원회 코디네이터
나의 텐트메이킹 / 변대현 선교사(GMS)
변대현선교사(GMS국내사역 북한지부)
저의 경우 – 선교사가 왜 자비량(텐트메이킹)하는가?
1. 파송, 후원 중단 또는 부족에 따른 재정자립(현실문제)
2. 재정독립과 자유로운 사역(셀프재정충당과 자유로운사역)
3. 사업현장을 통한 전도, 선교영역확대(선교전략적 도구)
4. 제한 받는 선교지역에서의 선교적 접근성 때문(지역 현장적 상황)
* 자영업의 이점 – 시간조율가능, 일과 사역병행 조정가
주제성구 :
사도행전 20장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 텐트메이킹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2020년1월 GMS선교사로 허입되어 파송교회에서 말레이시아로 파송이 확정되었다. 장기비자(MM2H)를 말레이시아 이민국에 신청하면서 그 해 2월에 가족들과 함께 말레이시아
로 출국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입국과 동시에 한국에 코비드19 확진자 1천명이 되었고, 말레이시 아는 국경봉쇄와 락다운을 발표했다. 말레이시아에 이미 셋집과 살림을 장만해 놓은 상태에서 90일 여행비자 완료되고 잠시 귀국 및 다시 출국을 기다리며 임시게스트하우스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시 출국할 기약이 묘연할 때에 파송교회 안수집사님의 권유로 에어컨분해세척을 배우기 시작했다. 배 울 당시엔 선교필드에서 사역형태로 사용할 목적을 가지고 배우기로 했고, 코비드19이 오랜 지속되
고 국경봉쇄가 장기화 될 줄 몰랐다. 2년 동안 필드로 나갈 길이 막히고, 한국에서의 생활이 장기화
되고, 파송교회가 후원을 중단하면서 배운 기술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여 자비량을 하게 되었다. 이 제 햇수로 4년이 되었다. 처음엔 혼자일을 다니다가 주문이 많아져서 알바생을 쓰기도 했는데, 나는 일보다 사역이 중심이고, 알바생은 돈을 버는게 중심이라 그 사람을 책임져야한다는 중압에 지금은 아내와 함께 일을 다니고, 함께 쉬고, 함께 사역도 다닌다. 지금이 가장 좋은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와 함께 시간을 맞추니 사이도 더 좋아지고, 무엇보다도 아내를 사역현장에 함께 동행하면서 사 역 동역자가 되었다.
- 이 업종을 택하게 된 이유
사실 파송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2011년 북한선교를 위해 중국 두만강부근으로 파송되었을 때도 사업(태양광, 풍력발전, 수질개 선)일 인계받아 비자발적 철수 전까지 건전한 사업가로 지역에 알려졌었기에 선교필드에서의 사업에 대한 관심과 아이디어들은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다시 파송되는 말레이시아는 년중 더운 날씨에 필수적으로 에어컨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이 사업을 통해 제자훈련과 재정적 자립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하 게 될 줄은 꿈에도 못 꾸었다.
- 하면서 보람, 장단점, 어려움, 에피소드
많은 사업들이 있지만, 생활환경개선, 건강들과 관련해서 많은 수요가 있고, 어느 사업보다 고객 들의 감사를 받을 수 있어서 보람이 되었다. 거기에 상황을 봐서 직접 복음도 전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은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어컨분해청소는 계절을 탄다. 4월~7월이 주로 성수기이고, 나머지 계절들에는 주문이 거의 없거나 간혹 냉 난방기를 동시에 가동하는 사업장위로로 일을 한다. 또는 비수기에는 에어컨청 소 외에 세탁기분해청소기술을 배워서 하고 있다. 기술과 아이템만 잘 습득해 놓으면 각 계절마다 비, 성수기 구분 없이 계속 일을 할 수 있다.
어려움이라면 워낙 다양한 에어컨 기종들이 있고 매년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기에 기술 습득과 청소 후 제품에러 등 여러 변수들이 발생할 때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냉난방기의 원리를 파악하고 다양한 제품들을 만나다보니 거의 파악이 되었다.
신혼부부가 사는 집에 청소를 가서 에어컨 분해 청소 과정을 보더니 너무나 필요성을 느껴 양쪽 부모님 댁과 가족 친척들까지 소개를 해주셔서 바로바로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어느 날은 사역자의
집에 가게 되어 나의 신분을 밝히고 간절히 축복기도해주고 예배도 드린 적이 있는데, 코로나로 예배
참석이 힘들었다가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고 좋아하셨다.
또한 불신자의 가정에서 간증을 통해 전도하고, 우울증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만나면 상담과 기 도를 해주기도 했다. 이 업종의 특징이 고객의 집에 직접 들어가고 직접 얼굴을 보고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시고,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복음전도와 사역을 펼칠 수 있다.
- 돈과 기독교성(Christianity)을 어떻게 조화할 수 있나?
중심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 세상 사업은 어쩌면 모든 중심과 목적이 돈이다. 우린 선교사다. 돈 이 필요하지만 중심과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한 달 일정표를 빈칸으로 만들어 하나님께 내 려놓고 기도했다.
모든 일정을 하나님께서 짜주세요. 주문이 들어오는 것, 어디서 누구에게 주문이 오는지, 어떤 제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무슨 요일 몇 시에 들어오는지.. 다 하나님께서 배정해주세요. 그러나 무 엇보다 저는 사역이 중심입니다. 일을 하다가도 제가 해야 할 긴급한 사역이 발생하면 하나님께서 미 리 조절해주셔서 돈 버느라고 사역을 미루지 않게 해주세요..
돈을 벌려고 하면 더 부지런히 움직이며 다양한 방법의 홍보나 아이템을 동원하여 얼마든지 돈 벌수 있겠더라. 그러나 그렇게 되면 돈에 끌려다니게 된다. 선교사로서의 정체성도 희석되게 된다. 그 래서 절제가 필요하다. 중심과 목적을 바로 잡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고 매일매 일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린다.
- 일을 하면서 잘못된 유혹이나 실패
– 사역보다 더 앞서려고 할 때, 제품에 이상이 있는데 그냥 덮어 두고 싶을 때
실패 – 기술습득 초창기에는 작업 후 알 수 없는 에러가 떠서 다시 A/S를 하러 간적이 가끔 발생 했다. 시간적, 비용적 손해이다. 어떤 경우는 끝내 내 손으로 못 고치고 제조사 A/S에 맡기고 비용을 다 물어줬던 경우도 있다. 이때 멘탈을 다 잡지 않으면 중간에 다 그만 둔다. 직장 다니다 이 사업에 달려든 일부 업자들도 초기에 이 과정을 못 넘어서 방금 산 장비들 중고마켓에 다 내놓고 손발 들고 나가는 경우 있더라.. 다 과정이다. 돈에 메이면 안 된다. 배우는 값이라고 생각해야 뛰어넘을 수 있다. 또한 초성수기에는 주문이 정신없이 들어온다. 그땐 하루에 감당할 수 있는 일정 이상을 배정해
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고 싶은 유혹이 들기도 한다. 새벽~저녁 늦게까지 일하고 늦게 돌아와서도 그날 받은 주문들을 정리하면서 일정을 배정하느라 거의 잠을 못자는 경우도 많다. 이 밀이 기본적 으로 기술과 노동집약이기에 적절한 쉼과 체력회복이 필수인데, 이렇게 무리하면 피로가 쌓여서 오 히려 건강을 해치기도 한다.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다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도록 포기하 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비수기에는 일이 없지만 성수기에는 하루에만 수십~백 만이상의 수입을 벌수 있기에 좀더
많이 하려는 욕심이 생긴다. 대부분의 이 일을 하는 업자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적절한 조절이 필요 하다. 몸과 마음과 영성의 자기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진상고객
– 처음부터 이상이 있었는데, 오이비락에 잘못 걸려 당신 잘못이니 물어 달라고 떼쓰는 고객.
한 식자재마트 에어컨 청소 후 오래된 제품이라 이상이 발생했는데, 청소비용을 떼이고 못 받은 것, 전화도 안받고.. 자존심 상해서 그냥 떼였다 생각하고 포기.-최근에 지인을 통해 결국 받아냈다. 수 많은 부류의 집들을 다니면서 인간들의 사는 만사 형태를 보게 되었다. 집이 엉망인 독신 청년들, 온 집안이 강아지와 고양이 소굴로 에어컨 구석구석 털이 꽉꽉 들어차 있던 집들.. 어떤 곳이든 마치 내가 품고, 이해하고, 배우고, 살려야 할 사역지로 보였다.
- 정체성에 대한 혼란.
이 부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잘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했다.
중국에서 사업할 때도 2년간 태양광 판넬, 풍력발전기만 만지고 있을 때 선교사로 나와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하는 정체성혼란, 그러나 그것조차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내어드리 니 그때부터 사역도 동시에 활짝 열리더라..
나에겐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런 자세로 늘 모든 일에 임한다. 그러면 사업도, 에어컨청소도, 먹고 마시며 쉬는 것도 다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난 이것이 분명하기에 이젠 결코 정체성의 혼란이 없다. 일을 하면 일로 하나 님의 나라 확장되게, 돈을 벌면 돈으로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 기술습득시간, 초기 투자비용
2020년 8월경에 처음 배워보자는 제안을 받고 기술자 따라 다니며 보조와 제품세척부터 시작했 다. 2개월 정도 어깨 넘어로 배우다 보니 가을, 겨울이 찾아왔고 일이 없었다. 그때는 쿠팡물류 분류 하는 작업을 나갔다. 그러면서 겨울은 그냥 지나갔고, 그러다 다음해 2021년 4월쯤 다시 불러서 일 을 다녔는데, 그러나 허리를 삐끗해서 잠시 쉬는 동안 나에게 직접 주문이 들어와서 장비 들고 살금 살금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왔다. 실제로 배운 것은 2,3개월 밖에 안 될 거다. 요즘은 유튜브에 찾으 면 잘 나온다. 고객이 연락 오면 제품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한다. 그러면 인터넷에 그것과 똑 같은
것 찾아내고, 그 제품을 분해 청소하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내서 몇 번이고 돌려본다. 작업 당일엔
그 영상을 떠올리며 프로처럼 일한다. 고객들은 내가 숙련된 기술자인줄 알지만 나도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흐르고 영상 본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조심 분해조립했다.
초기비용은 약간의 장비들인데, 첨부터 완벽하게 구비할 필요 없고, 일을 하면서 필요에 따라 자 기한테 맞는 것들 조금씩 구비하면 된다. 차는 필수(소형 히치백~탑차, 승합차까지 요령 것 적재하면 다 가능), 기본 장비는 전동드라이버와 간단 수공구(장비사진), 가대, 고압세척기, 분무기, 카터구루 마 정도… 차량제외 대략 50~100여만 원부터. 넘 장비욕심 낼 필요 없다. 늘 사용하는 것만 사용함.
- 이 기술의 장단점
약간의 손재주와 눈썰미만 있으면 금방 배울 수 있고 금방 나름 기술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 다. 그 다음은 계속 많은 제품들을 다루면서 경륜이 쌓이면 된다.
시급으로 따지면 최소한 5만 원 이상은 한다. 잘 알려지고 홍보가 되어서 대량 건(학교, 관공서,
건물전체)잡으면 한 순간에 수백, 수천도 벌 수 있다.
일이 많으면 사람을 쓸 수 있고 일과 제자삼기도 가능.
자영업이기에 고정 직장처럼 매이지 않고 일과 사역을 조절할 수 있다.(예배 있는 날 사역 있는 날은 작업 안함)
집으로 직접 찾아가서 대면할 수 있는 기회 있다.(전도)
중국에서 정수기와 녹물필터 사업할 때도 집집마다 직접 가서 설치하면서 시간을 보냄.
- 이 사업의 접근방식, 어떻게 배우고 시작할 수 있나?
도제식(주변에 잘하는 사람을 부탁해서 따라다니면서 차근차근 배움)
교육시설(일정한 교육비를 내고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 – 네이버 “에어컨유지보수클럽”카페에 정보 있음)
동네 주변 폐가전 고물상을 잘 관계하면서 직접 분해, 조립, 연구하기 인터넷 유튜브 등의 영상물 참조..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그 외 추천하는 다른 사업 아이템들(사람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
수도, 배수관 설치 및 수리 도어락설치 TV설치(무타공)
베란다 의류건조대
각종 집수리, 간단 인테리어분야
– 장비중복 사용가능, 기술 중복 가능한 분야들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유리함
중요!!
일과 사역을 어떻게 병행하고 있는가?
나는 사역자(목사, 선교사, 전도자)라는 마인드를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
또한 모든 필요는 하나님께서 주의 종인 나에게 채워주신다는 명확한 확신과 신뢰가 있어야한 다. 그러면서도 그 필요가 감나무 홍시 떨어지듯, 엘리야의 까마귀처럼 올 수 도 있지만 내 으로 나 에게 주신 기술적 은사를 활용하여 돈을 직접 벌수 있도록도 해주신다는 보편적 인도에 대한 믿음 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 선교사가 일을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명확한 자기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목회적, 선교적 상황들이 많이 변화되었다. 목사나 교사가 현실에도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교회의 선교적관심과 현실도 너무나 많이 변화되었다. 코비드를 겪으면 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파송해제와 후원중단을 겪고 있고, 가족생존의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 생활 이 되어야 그것을 바탕으로 마음껏 사역도 펼칠 수 있다. 일하느라 사역 못하지는 않는다.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고, 더 파워풀하게 할 수 도 있다. 본인은 현재 국내 북한지부 소속으로 경기북부에서 탈 북민 사역을 하면서 탈북민과 남한성도 연합으로 모인 교회에서 선교목사로 사역하면서 탈북민들을 훈련하고 예배인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별도의 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사들을 후방에서 후원하고 북한접경에서 사역하는 분들을 돕고 있다. 선교지에 있을 때보다 사역적으로도 더 지경이 넓혀졌고, 더 바쁘게 해야할 사역들도 많아졌다. 그러면서 물질에 쪼들리지 않고 후원중단에 불안해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생활비를 벌고 있다. 물질적으로도 넉넉해지고, 그 물질로 자신 있게 나눠주며 사역 도 더 강하게 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있는 자비량 사역 / 샘소리 선교사(GMS)
시작하면서
본 발제에서는 이론을 간단히 제시하고 현장에서 실제적인 상황을 중심으로 몇가지로 소개하면 서 현실과 현장의 경험을 참고로 앞으로 자비량 사역에 참고하여 효과적인 사역을 하는데 참고가 되 기를 바라면서 나누려고 한다.
지난 2020년-2022년 이 3년 동안 한국교회와 선교사역에 큰 변화로 새판 짜기 사역이 시작 되 고 있다. 오늘날 사역에 있어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사역에 심각하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현실이다. 지금 국내에 많은 목회자들은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더구나 작은 교 회 목회자는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경제 활동을 해야 하고 사모님들은 기본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실 정이다. 많은 선교사들은 재정적인 난으로(파송교회가 끊어져서) 자비량 사역에 있어서 고민이 많이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선교사들에게는 현실이다. 그래서 자비량 선교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함께 고민 하고 해결점을 찾아보면서 함께 자비량 사역을 이루어 가기를 원한다.
본 발제의 내용은 본인이 2018년 2월부터 자비량 사역에 실제의 상황과 경험을 중심으로 정리 한 것을 함께 나누면서 더 효과적인 자비량 사역을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여기서 개인의 견해와 상 황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밝힌다.
- I. 성경적 근거와 어원적 근거
- 성경적 근거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사역을 통해서 Tent Maker, 자비량 선교를 찾아 볼 수가 있다. 바울은 천막 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선교사역을 하였다(행 1:3). 고전 4:12에서는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 며” 라고 하면서 Tent Maker 사역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후 11:27, 살전 2:9, 살후 3:8). 사도 바 울은 일을 하면서 선교를 하였다. 일명 자비량 선교 또는 일터 선교라고 할 수가 있다. (김홍철 “바울
의 노동과 선교, 그 현대적 적용”, 월드뷰(Worldview), 2018년, 11월호, P 19)
고후 10:14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와 Tent Maker 선교를 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Tent Maker 사역은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 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 자라. 바울이 그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
므로 하께 살며 일을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1-3)”는 것으로 소개가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수가 있는 것은 바울은 자기의 전문 기술인 천막 만드는 생업을 하면서 사역을 하였다. 또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은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생업을 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였음을 보면서 이것이 성경적인 근거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Tent Maker라 할 수가 있다.
- 어원적 이해
우리가 오래전부터 익히 잘 알고 있는 용어는 Tent Maker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용어로 소 개가 되어지고 있다. Tent Maker와 동일하게 Bam 이라는 용어도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는 Tent Maker로 익숙하고 좋은 용어로 보편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다. 여러 학자들과 동역자들의 견해를 참고하여서 본인은 Bam 이란 용어는 Tent Maker 선교에 있어서 한 부분이라고 이해를 한다. 어쨌던 Tent Maker, 자비량 선교는 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용어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도 바울은 Tent Maker로 분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본다. “Tent Maker를 자비량선교, 자립선교, 일터선교, 일하는 선교, 장막선교” 등으로 소개가 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2021년부터 출판이 된 책과 논문, 강의를 참고해 보면 “자비량 선교, 일터선교”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과 실제적인 사역일 것이다. 그래서 Tent Maker를 자비량 선교로 언어를 통 일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본 발제에서 Tent Maker란 말을 이하 자비량 선교로 사용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이하 자비량 선교라고 통일을 하려고 한다.
이 자비량 선교에는 몇 가지의 의미로 이해를 할 수가 있다.
첫째로, 제한접근지역에 사역을 하려면 공식적으로 거주 비자를 받을 수가 없기에 거주 비자를 얻기 위해서 자비량 사역으로 사역을 하는 것이 있다. 이는 사역 시작부터 진행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파송교회가 없거나 끊어지고 개인적 후원이 아주 줄어들고 끊어진 경우에 생활비와 사 역비의 해결을 위해서 하는 의미로 자비량으로 선교로 사역을 하는 것이 있다. 이는 1차로 파송교회 와 여러 후원으로 사역을 하다가 원치 않는 재정적인 어려움 상황으로 늦게 자비량 사역을 하는 것이다. 셋째로, 원래 전문기술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 전문인 자비량 사역이 있다. 과거에는 극소수였지만 2 천년에 들어와서 점점 수가 늘어나고 있고 한국교회의 분위기이다. 벰(BAM)은 여기에 속한다고 본다.
벰(BAM)은 Tent Maker에 한 부분이다. 단독이 아니다. 분리해서 설명하는 것, 이해를 하는 것
은 곤란하다고 본다. 이론적으로 논한다면 여러 내용이 있다. 어떤 용어가 합당한지는 신학자와 선교 학자들의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고 뜨거운 논쟁의 하나일 것이다. 성경적인 용어가 필요하다. 그 리고 이론이 아니라 실상이 중요하다.
이 세 가지의 특징에는 반드시 전문 분야에 전문 기술을 가지고 사역을 하는 것이다. 본인은 두 번째의 상황으로 자비량 선교의 사역을 하고 있다.
- 바울의 자비량 사역의 목적(한국선교 KMQ 2021년 12월 통권 80호 P 16-18)
우리는 바울의 1차에서 3차에 걸쳐 직업을 통해 일을 하면서 복음을 증거 했음을 알수가 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자비량 선교를 한 이유 목적을 아래와 같이 몇가지로 살펴볼 수가 있다.
첫째로, 바울은 그의 청중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자 비량 선교를 하였다.
둘째로, 바울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전파를 위해서 대상자들과의 자신의 동질성을 염 두해 두고 있었다(고전 9::19-23).
셋째로, 바울은 자비량로 사역한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본을 보여준 것에 관심을 가졌 기 때문이다(살전 2:9, 고후 12:16-18).
넷째로, 새롭게 시작한 교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게 하려고 자비량 선교를 실천하였다(딤전 3:7). 다시 정리를 한다면 바울의 자비량 선교는 다른 후원이 없어서라기보다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 하려는 핵심 선교 전략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살후 3:7-9, 행 20:33-35, 살전 4:11-12).
- II. 자비량 사역에 대한 시대적 이해
- 현실적으로 자비량 사역 이해
파송교회가 있고 후원이 제대로 되어 있으면 자비량 사역과는 관계가 없이 열심히 사역을 하면 된다. 장, 단기적으로 선교사역에서 파송교회가 끊어지고 후원이 끊어질 때, 추방이 되었을 때는 상 황에 대비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장기선교 사역에는 많은 변수가 있다. 선교사 훈련을 하면서 준비하는 예비 신임 선교사들은 앞으로 선교사역과 후원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자비량 사역 으로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자비량 사역에 대한 이해
자비량 선교에 있어서 일은 일반적인 단순한 아르바이트의 일이 아니고 대중적인 전문기술로 일
을 하면서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비량의 사역은 몇가지 이해에 따라서 사역의 상황이 다
르다. 평신도로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게 부르심을 받아 신학을 하고 목사로써 훗날에 사역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자비량 사역에는 이미 완충의 경험이 되어서 힘이 좀 덜 들 것이다. 그러나 신학만 하고 목회자로 선교사역을 한 선교사들에게는 어려움이 많다. 막상 현실을 당하면 어떤 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에 아주 당황스럽고 어렵다.
그런데 자비량 선교에 가장 큰 문제점은 “사역자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의 정체성이다.” 이 자비량 사역은 재정문제 해결에 중심이 아니다. 사역을 위한 일이다. 선교사에게 물질로 후원하는 사역은
누구나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재정을 강조하고 중심이 되면 선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선교는 전문 일이다. 한 영혼을 구원을 하여 교회를 세우고, 또 다른 민족과 문화, 언어권에 사람들에게 복 음을 전하는 것이다. 본질을 이루기 위해서 개인의 은사, 일을 사용하는 것이다. 선교는 실제 현장이 있어야 한다. 건강한 성도, 교회, 사역은 현장이 있어야 한다. 이 발제에 중심은 실제 현장에서 상황 과 문제의 고민을 나누면서 앞으로 더 효과적인 사역을 하자는데 있다.
자비량 선교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의 파송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 을 하면 아주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여러 상황 형편으로 인해서 일을 하면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무엇보다 선교사역의 본질을 떠나거나 관계없는 것에 집중이면 자비량 선교가 아 니다. 이것이 자비량 선교의 큰 어려움이며 문제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여러 형편으로 자립선교를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하게 있는 동 역자들에게 본인의 케이스를 소개함으로써 자립선교를 하는데 그림을 그리고 실제로 개인의 상황에 맞는 것으로 준비하여서 자립선교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 있다.
III. 자비량 선교사역의 실제
-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게 된 배경과 동기
본인의 경우 두 번이나 파송 교회가 끊어졌다. 2013년 3월 고난주일에 파송교회가 파송 후원을 끊었다는 통보를 받으면서 진로와 사역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중국선 교는 점점 불확실하고 후원은 점점 줄고 중국선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어서 앞으로 사역의 진로 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마침 2017년 말에 사역진로와 사역비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최종 결정을 내리고 추방이 되면, 파송교회가 끊어지면, 개인 후원 협력이 점점 줄어들면 교회의 의존이 아니라 국내에 있으면서 자비 량으로 사역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자비량 일을 찾기에 망망했고 심적으로 많 이 고민이 되었다.
이미 2013년 파송교회가 끊어지고 8월에 안식년을 할 때 아내는 10월부터 요양원에서 일을 하
면서 자비량 사역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는 생활비는 해결이 되겠지만 사역비로는 불가 능했다. 2018년 당시 본인은 비자 관계로 매번 3개월에 한번씩 일시 귀국을 하여 약 한 두 달 정도 있 을 때 이 귀한 시간을 활용하여 자비량 사역을 위해서 전문 기술을 배웠다.
2017년 한 해 동안 진로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하면서 기도로 준비 중 거리에서 청소하는 차량 을 보고 청소하는 것을 배우기로 하고 인터넷에서 알아보던 중 교육하는 업체를 알아서 상담을 하고
교육을 했다. 2018년 2월에 5일간 배우던 중 현장을 방문할 때에 담당자가 “청소는 하지 말라. 경제
적인 도움이 안 된다, 메리트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줄눈 시공을 배우면 돈이 되니 아주 좋다”고 하 기에 바로 인테넷에서 검색으로 알아보고 교육하는 곳을 찾아서 주 5일간 배웠다. 교육 후에 현장에 서 실습이 필요하기에 여러 업체에 다니면서 다양하게 구체적으로 배웠다.
또한 2019년 1월에는 욕실과 싱크대 상판 유리막 코팅을 배워서 줄눈 시공과 유리막 코팅을 전 문으로 배워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은 육체의 노동이기에 아주 힘이 든다. 그렇지만 아주 보람이 되 고 많은 것을 배우며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18년 11개월간 인테리어 업종에 한 부분인 줄눈 시공과 유리막 코팅을 배워서 2019년부터 시작을 하여 2023년 6월 현재 5년 6개월째로 일을 하고 있다.
앞으로 파송교회가 끊어지고 개인 후원이 적은 선교사가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는데 아주 좋다 고 생각하며 추천을 한다.
- 오늘날 자비량 사역을 위한 어려운 상황과 해결
1) 자비량 사역을 위한 어려운 상황
이제는 교회의 전적인 후원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어려워지는 상황이고 앞으로 도 더 심각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의 자영업이 무너지고 있다. 30-40대 성도들의 신앙과 헌금 에 대한 정체성과 헌신이 많이 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선교사역에는 재정적인 안정이 되지 않으면 사역을 할 수가 없다는 것에 부인할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선교사 자신이 어떻게 해야 경제적인 문제 해결로 계속 원할한 사역을 할 수 있는지 깊은 고민을 하면서 구체적인 점검으로 빨리 정리를 하고 결정하여 사역이 지속 되도록 하 여야 한다. 재정적인 어려움의 해결로써 먼저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시대와 환경, 상황은 빠르게 늘 변한다. 또한 선교의 방법, 환경, 상황은 변하지만 선교사역은 계속해야 한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파송교회 중심이었다. 지금은 코로나 19 펜데믹과 러시아와 우크라이 나의 전쟁으로 인한 국제적인 정세의 상황이 어려움으로 선교에 대한 반응, 환경은 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코로나 시작 전과 전혀 다르다. 특히 담임목사가 은퇴를 하면 대부분 파송이 끊어 지는 상황이다. 본인도 그 상황으로 두 번이나 경험을 했다(2013년3월. 2018년11월). 2019년부터 현
재는 파송교회가 없어서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2) 생활비와 사역비 해결
국내에서 사역을 하는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자비량의 일들을 살펴보면 다양하게 많이 있다. 그런데 실상은 대다수가 모르고 있다. 자비량 사역을 위해서는 선교사 자신과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 고 과감한 의식전환이 필요하다. 구지 교회에 의지하여 짐을 지워서 부담이 되게 하는 것은 서로가 힘이 든다.
목회자, 선교사가 노동을 하면서 사역을 해야하는 시대임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자존심 다 내려 놓고 현실을 보고 현실에 맞게 사역을 당당하게 해야 한다. 우리 선교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 면 많이 있다. 현실의 상황과 시간을 참고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잘 모르면 우선 정부가 주도하 는 고용 기술 교육에 참여하여서 단기간(3-6개월) 생활비를 지원 받으면서 교육을 하다보면 개인의 적성에 맞는 일을 만나게 된다.
- 본인의 자비량 사역의 실제
1) 일의 내용
2019년부터 줄눈 시공과 코팅 시공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욕실과 주방, 거실 바닥과 벽, 주방 벽에 줄눈 시공과 욕실과 싱크대 상판 유리막 코팅). 이런 일은 건강과 직접 관계가 있어서 전망이 있다.
2) 수입
수입은 일정하지가 않다. 일에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많다. 시작할 때 교육비와 장비, 차량 구입 으로 1,500백만원 이상 투자가 되었는데 2년 만에 투자 비용이 회수가 되었다. 타 업체의 요청으로 일을 할 때 하루 일당으로 수입이 있다. 개인적으로 오다를 받아서 일을 할 때는 고객의 상황에 따라 서 옵션의 정도에 따라서 수입의 차이가 많다.
3) 후원
2019년 11월부터 2023년6월까지 8명의 선교사 가정에 후원을 하고 있으며 매월 선교사 한 가정 이상 식사 대접으로 위로하면서 섬기고 있다.
4) 선교사가 자비량으로 할 수 있는 일
무엇보다 시간이 자유롭고 대중적인 전문기술로 고소득이 되는 업종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인 테리어 업종에 청소, 줄눈, 코팅, 가전자품(에어컨, 세탁기) 청소, 도배, 새집증후군, 냄새 제거, 영상 제작, 어린 아이들 돌봄, 방과 후에 자녀 돌봄, 정리정돈(집안 환경, 옷, 주방, 이사짐 정리, 계절로 정
리정돈), 학원이나 유치원, 어린이 집에 차량 운행, 사회복지에 상담사역, 미용, 미디어 등이 있다. 특
히 여성선교사(사모님들 포함)에게는 어린아이들 돌봄, 방과 후에 자녀 돌봄, 여성들은 정리정돈(집 안 환경, 옷, 주방, 이사짐, 계절로 정리정돈, 사회 복지사, 사회복지 상담사 자격증 획득으로 개인의 은사에 따라서 다양하다.
5) 본인의 자비량 사역의 실제
본인은 인테리어 업종 중에 한 부분인 전문기술로 줄눈 시공과 유리막 코팅 일로 2018년2월부터 준비하면서 배웠다. 2019년1월부터는 직접 사업이 시작하여 안정적으로 일을 하면서 경제적인 문제 해결, 사역 시간에도 자유롭게 하고 있다. 자비량으로 사역을 할 동료들에게 권면을 한다면 “반드시
시간과 물질을 전적으로 투자를 하여 대중적인 전문적 기슬을 배워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사역이 되기를 바라면서 도움을 주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많은 업종이 있다.
이 줄눈과 코팅 일은 시간이 자유롭고 수입도 좋고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노후 대책에도 좋다. 한 주간에 2-3일 일을 해도 수입이 안정적이고 많다. 단, 오다를 받을 경우이다. 이 기술을 완벽하게 배워서 자기적으로 오다를 받아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6개월 이상은 인내를 해야 한다(본인은 사역 관계로 시간이 한정이 되어서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 실습 기간에 는 기초부터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다. 기술도 배우지만 영업을, 고객과의 응대와 관리를, 일에 필요한 기술과 다양한 것을 구체적으로 배웠다.
이제는 전적으로 교회의 후원을 안정적으로 받는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 더구나 중국선교에는 후원을 끊는 상황이다. 또한 선교사도 자비량으로 일을 하면서 사역을 해야하는 현실이다. 교회의 전적인 후원으로 사역이 어려워져가는 상황에 자비량으로 사역을 준비하고 당당하게 힘차게 사역을 해야 한다. 자비량 선교는 평신도만 하는 줄만 알았고 우리 목회자 선교사는 하기가 어렵고 곤란하다 고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 IV. 자비량 사역에 있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
파송이 끊어지거나 추방 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국내에서 사역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자비량 으로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선교사역을 하는 선교사가 간단한 알바로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사역의 시간에도 도움이 안 된다. 현재 국내에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여러 상황에서 일을 하는데 주로 택배 물류 분리, 배달, 요양사로, 단기 일용직 알바, 간 단한 알바 등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일들은 단기적이면 시간제한이 많아서 사역에 어려운 점이 많다. 또한 장기적으로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아쉽게도 전문기술을 가지고 일하는 선교사는 아주 극소수인걸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 공개하지 않아서 완전히 파악은 어렵다. 자비량 사역을 위해서 자비량 사역의 이해에 대 하여 몇 가지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선교사 자신의 소명과 사명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하여야 한다.
자비량으로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일을 하는데 집중을 하다보면 수입이 집중이 되어서 사역이 뒷전이 되어 본질을 잃게 될 수가 있다. 이는 아주 중요하며 본질에서 멀어지는 유혹이 많다. 한국에 있는 다문화 가정, 유학생 등 여러 다양한 외국인이 350만명 이상이 넘는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안 정적으로 현지인 대상의 사역을 도외시 하면 안 된다.
- 현실을 인정하라.
이는 경제적인 상황이다. 전적으로 교회의 후원으로만 사역을 한다는 것은 점점 어렵기에 자비 량으로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자기의 적성에 맞는 일을 미리 준비를 하여서 자비량 사역을 해야 한다. 반드시 교회의 후원만으로 선교사역을 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내려놓아 야 한다. 교회의 후원이 어려울 때는 다양한 현실과 사역의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각 교단별로 목회자가, 선교사가 일을 하면서 사역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이라도 부끄러워 하지 말고 할 준비가 되도록 인간적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임해야 한다.
- 반드시 시간을 투자하여 대중적인 전문 기술로 준비를 해야 한다.
이제는 80세까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적인 전문 기술이 있어야 한다. 재정적인 문제 해결로 사역을 원할이 힘있게 할 수가 있다. 노후 대책에도 도움이 된다. 이 전문적인 기술로 일을 하려면 일정한 기간(최단 6개월 이상 1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여서 올인을 하여서 준비를 해야 한다. 반드시 전문기술을 6개월-1년 정도는 올인을 하여야 한다. 알바의
의식으로 단기간에 전문 기술을 배울 수가 없다.
- 반드시 일정한 재정을 투자하여야 한다.
반드시 재정적인 투자가 있어야 한다. 교육비, 장비, 차량 구입 등에 투자가 되어야 한다. 본인은 1,500백만원을 투자하였다. 재정은 기본 교육비와 장비, 차량구입비 등 정도로 기본적인 적은 금액으 로 투자를 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업종의 일을 하는 것이 좋다. 재정이 많이 지 출이 되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좋다. 지출이 많은 일에는 피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시간, 체력, 맘이 사역의 본질에서 빚나가는 위험이 많다. 사역이 제대로 안된다. 수천이나 수억의 재정을 드려서 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되면서 사역의 본질에서 아주 위협이 되기도 하다. 사역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게 된다.
- 사회 환경을 잘 이해를 하라.
변화. 발전상, 일자리의 큰 변수가 있다. 2020년부터 코로나가 시작이 되면서 자영업이 무너지고 있다. 알바자리를 구하기가 아주 어렵다. 남성이 50세 접어들면서 안정된 수입의 일자리가 어려운 상 황이다. 그래서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대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 꼼꼼하게 다양하게 배워야 한다.
대충 알바식으로 배운다면 전문기술로 일을 할 수가 없다. 꼼꼼하게 전문 기술을 잘 배워두면 장 기적으로 오랫동안 건강이 허락하는 시간동안 일과 함께 사역을 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고객 상담 부터 AS까지, 문제 발생시 해결에 대해서, 상담 때 진상 고객 파악 여부를 2-3분 안에 빨리 파악을 하도록 한다.
-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동료(협력 업체)가 있어야 한다.
관계된 3-4개 업체와 협력이 되어야 한다. 혼자서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서로 협력으로 일이 되 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할 수가 있다. 일이 많을 때 함께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이 없을 경우에 서로 협력으로 할 수가 있어야 한다. 할 수 있으면 일을 팀으로, 사역을 팀으로 되어야 장기적으로 문 제없이 진행이 된다. 선교사들이 자비량 사역에 있어서 업종이 비슷하면 팀으로 일을 할 수가 있고 사역도 팀으로 협력으로 할 수가 있다. 이 자비량 사역의 일을 팀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메리트 가 있다.
- 차량을 반드시 구입을 한다.
업종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시작 때에는 부담이 없는 중고 차량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 사업자 등록을 하는 것이 좋다.
사업자 등록이 되어 있으면 소비자들에게 신뢰가 된다. 세금계산서 영수증 발행이 된다. 차량 구 입 때, 영수증 발행 때, 장비, 재료 구입비의 일부가 부가가치세 납부 후에, 세금 혜택, 연말 정산에도 도움이 된다. 재난으로 국가 지원금이 있을 때 지원을 받는다. 대출을 받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 다양하게 홍보를 해야 한다.
자비량 사역을 위해서는 다양하게 홍보가 되어야 한다. 본인은 시작을 할 때에 1년 동안은 현장 에 다니면서 명함을 가지고 직접 현장에서 발품을 팔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을 할 때에 사진을 찍 어서 블로그에 자세한 설명으로 소개를 하였다. 1년 후부터는 블로그에 집중으로 홍보를 하면서 일 을 하고 있다. 또한 고객이 전화를 할 때 15초 동안에 업체의 사업에 대해서 멘트로 홍보를 하는 것,
통화를 마치면 고객에게 문자 명함을 보내는 것을 계속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아래와 같다.
1) 시작 1년 동안은 직접 발로 뛰어 다녀야 한다.
2) 블로그에 올려서 홍보를 한다.
일할 때마다 전후의 사진을 다양하게 많이 찍어둔다. 여러 업체에 홍보 블로그를 살펴보고 6개 월 이상은 업체에 맡겨서 문장 작성을 의뢰하다가 직접 블로그 작성을 하도록 한다. 바쁠 때는 문장 내용만 업체에 의뢰하여서 수정 후 올리면 된다.
3) 고객이 전화를 할 때에 업체를 소개하는 멘트로 홍보를 한다. 통화 후에 업체 명함을 보내는 것.
4) 고객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저장 해둔다.
5) 명함을 준비를 하고 현수막을 준비하여서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고, 일을 할 때에 주차 시에는 현수막을 앞 유리에 부착을 해둔다. 개인적으로 행정 업무를 볼 때에 명함을 주는 것도 좋은 홍보이다.
- V. 자비량으로 일을 하면서 장점(사역의 효과와 장점)과 어려움
- 자비량으로 일을 하면서 장점
1) 생활과 사역에 활력이 된다.
주 고객은 불신자들이기에 개인 전도에도 좋은 기회가 된다. 불신자들을 많이 만나기에 복음전 파에 정체성과 자세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된다.
2) 노동의 중요성과 귀한 가치를 알게 된다.
3) 성도들의 생업과 헌금에 대한 이해가 피부로 배운다.
4) 땀을 흘리면서 몸을 많이 움직이니 육체적 건강에 좋다.
5) 경제적인 해결이 된다. 사역의 마음과 이해, 필요성, 자세가 넓어진다.
6) 일을 팀으로 할 수가 있다.
7) 불신자들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8) 직접 노동을 하면서 사역을 하므로 사역에 더 큰 의미와 보람이 있다.
9) 사역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아주 좋다.
10) 강의, 말씀 전할 때 현장에서 살아 있는 경험을 적용하니 더 힘이 있다.
11) 노후 대책에도 큰 도움이 된다.
12) 물질적으로 다른 동역자들을 후원할 수가 있다.
13) 사역을 팀으로 효과적으로 할 수가 있다.
- 자비량으로 일을 하면서 어려움과 문제점
1) 어려움 점
(1) 진상 고객을 만났을 때,
(2) 일이 한꺼번에 몰려서 혼자서 일을 하게 될 때,
(3) 협력자와 같이 일을 할 때 일이 맘에 안들어서, 같이 일을 할 수가 없을 때,
(4) 될 수 있으면 목회자와 아는 교회 교인들 대상으로 고객일 때 일에 결과에서 부정적인 결과가 있게 되는데 조심을 하여야 한다. 신앙과 경제적인 일에는 이해가 다르기에 여러 가지 오해로 문 제가 발생이 되어서 인간관계와 여러 상처가 될 수가 있다.
2) 문제점
(1) 사역을 핑계로 상업화적으로 치우지는 유혹을 받는다.
(2) 이벤트화에 유혹으로 사역이란 본질에서 멀어지는 상업인으로 유혹을 받는다.
(3) 경제적인 일로 원래 사역에서 멀고 제3자에게 강의 사역으로 중심이 되는 유혹을 받는다. (4) 고객에게 선교사로서 자비량으로 사역을 한다는 것을 알리면 많은 부정적인 결과가 있게 된 다. 고객에게는 자연스럽게 알려 지만 자비량으로 사역이라고 하면 되지만 구지 먼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V1. 앞으로의 자비량 사역을 위한 바램과 연구해야 할 점
- 사역을 위한 연구해야 할 점
1) 일과 사역이 잘 융합을 해서 사역이 효과적으로 되는 것.
2) 파송교회, 후원이 없거나 아주 적으니 기도의 후원이 아주 적어서 사역에 어려움으로 자비량 사역이 쉽게 되지 않는다.
3) 지속적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는 것.
4) 선교사들의 자비량의 일을 팀으로 활성화가 되도록 하는 것. 예로 CBMC(기독실업인모임)와 같은 팀
- 사역을 위한 바램
1) 현실을 인정하고 빨리 전문적인 기술의 자비량으로 사역을 전환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2) 과감하게 시간과 재정을 투자를 한다.
3) 자비량 사역의 공유를 할 수 있는 센터가 있으면 좋겠다. 예로 KWMA가 중심이 되어서 자 비량 사역센터가 있어서 효과적인 사역이 되도록 지원이 되면 좋겠다.
4) 선교훈련 때 이 자비량 사역에 대해서 필수적으로 교육이 있으면 좋겠다.
5) 추방과 훈련이 끊어졌을 때 계속 선교단체가 중심이 되어서 자비량 사역이 되도록 공유가 되 면 좋겠다.
마무리를 하면서
무엇보다도 자비량 사역을 하는 데는 자신이 “선교사라는 정체성”을 늘 기억하고 본질에서 벗어 나지 않도록 사역이 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와 교회의 현실을 잘 이해를 하고 지속적으로 사역을 하 려면 재정적인 안정이 되어야 하는데 선교단체의 협력으로 전문적인 기술로 장기적인 사역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사 개인이 자비량 사역을 시작과 진행을 하기에는 어렵다. 팀으로 일을 하며, 사역도 팀으로 되어질 때 서로가 협력이 되어지고 잘못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여러 문제들 을 해결해 가면서 힘 있는 사역이 되 된다고 본다. 특히 KWMA에서 자비량 사역에 대한 모임이나 연구의 센터가 있으면 선교사 개인, 각 선교단체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마무리를 하면서 현재와 미래의 선교사역은 자비량으로 사역이 필수적으로 되기 때문에 여기에 맞게 개인과 교회, 교단, 선교단체가 잘 이루어 가도록 하면 더 힘이 있고 왕성한 선교사역이 되리라 바람이다. 본인의 자비량 사역을 참고로 앞으로 자비량 사역에 관심이 있거나 준비를 하는 선교사에 게 그림을 그리는데 귀한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
선교지 비즈니스(BAM) 창업훈련 -네오모라비안하우스를 중심으로- / 소영섭 선교사(바울선교회/나우미션)
- 네오모라비안하우스 설립배경
IBA(International BAM Alliance)는 한국교회 안에 BAM 운동을 위해 50여 개의 선교단체, 지역교회, 기업들이 연합하여 운영하는 비즈니스선교 연합체이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중 국 상하이한인연합교회에서 목회자, 선교단체 대표와 현장선교사, 그리고 기업 대표들이 모여 BAM 포럼을 진행해 왔고, 2010년 즈음 IBA 조직을 형성한 가운데 지금까지 매해 BAM 리더들을 위한 리더스포럼과 대중을 위한 컨퍼런스, 그리고 영역/이슈 네트워킹 모임들을 진행해 왔다.
특히, 해외 선교단체들의 Business As Mission 기업의 창업과 운영에 대한 필요성은 갈수록 늘 어나는 상황에서, 건강한 BAM 생태계구성을 위해 선교단체들을 위한 BAM 스쿨의 필요성을 절 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 사업가들이 하는 BAM 창업과는 달리, 선교단체에 소속된 선교사들의 BAM 기업 의 흥망은 개인을 넘어서서, 선교단체와 파송 교회, 그리고 현지 교회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 서 선교단체는 선교적 교회로서 파송 선교사들의 건강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BAM과 관련하여 어떻게 선교사들을 멘토링하고 도와야 할지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지 않고 파송 교회도 역시 같은 한계를 안고 있다.
둘째, BAM 선교와 관련한 다양한 형태의 어려움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관련된 개인들이 공동체적으로 보호되고 점검되며 지도받을 필요가 있다. 또한 선교단체는 BAM 기업의 공동체적 책임성(Communal Accountability)을 배워 나갈 필요가 있다. 선교단체가 공동체적 책임성을 학습 하여 BAM 선교에 적용해 나갈 때, BAM 선교와 관련한 전체 생태계가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개별 선교단체가 BAM 선교와 관련하여 선교사, 파송 교회, 선교단체 스스로를 교육하고 훈련하기에는 자원의 한계가 있으며, 이 일은 연합차원에서 같이 진행할 필요가 있다.
IBA는 이상의 이유로 다양한 선교단체들과의 컨설테이션을 해왔고, 2015년 6월 제9회 IBA 모 임에서 해외선교단체 연합 차원에서의 BAM 스쿨인 네오모라비안하우스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 BAM 창업을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1
선교지에서 비즈니스 창업을 위해서는 여러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지만 특별히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미션을 위한 BAM 창업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가지는 꼭 고려해야 한다.
2.1. 비즈니스의 목적에 대한 오해의 극복
BAM을 하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은 비즈니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벗어나서 비즈니스는 하 나님께서 인류 가운데 만들어 놓으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확신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죄악으로 물든 사람들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왜 곡된 현실이 만든 비즈니스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다. 비즈니스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비즈니스를 하 는 목적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하는 목적을 돈을 버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Good to Great)>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경영컨설턴트인 짐 콜린 스는 제임스 포라스와 공동 연구로 <성공하는 기업의 8가지 습관 (Built to Last)>를 출간했다. 사실
이 책의 우리말 제목은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당시 출판계의 화두였던 ‘7-8가지 습관’ 시리즈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붙인 것으로 원문 제목은 “영속하는(last) 기업 만들기(built)”로서 50
년에서 100년동안 세대를 뛰어넘어 압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기업들의 특징을 조사 연구한 책이
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부서진 12개의 신화들’이란 장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공한 기업에 대 한 신화적 믿음과 현실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그 중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신화: 성공적인 회사들은 우선적으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현실: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원리인 ‘주주의 부의 극대화’ 또는 ‘수익 극대화’는 비전 기업들의 역사를 볼 때, 그들의 주요 목표나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힘은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목표를 추 구했는데, 돈을 버는 것은 그 중 하나였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그들은 이익을 추구 했으나 동시에 핵심이념 – 돈 버는 것 이상의 핵심 가치와 목적의식에 의해 인도되었다. 하지만 모순 되게도 비전 기업들이 그들보다 더 이익을 추구한 기업들 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 추구만일 수 없다는 이야기다. 세속의 경영학에서도 기업의 목적이 이익의 극대화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하게 되는 BAM의 목적이 이윤이나 돈 버는 것에 있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 기 위해 벌이고 있는 일들은 선한 일도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들이며 이에 대해
저명한 신학자인 그루뎀은 “어떤 선한 것이 왜곡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
1 이 내용은 KMQ (한국선교) 2018년 봄호에 실린 필자의 글 “BAMer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임
은 옳지 못하다.”라고 하여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비즈니스의 선함을 변호하고 있다.
BAM 기업의 목적이 돈 버는 것에 있지 않다면 BAM 기업은 이익을 남기면 안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BAM 기업도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이다. BAM을 처음으로 정의했던 로잔의 BAM 위원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보면 ‘BAM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 나 보고서는 BAM 기업의 이윤 추구는 기업의 유지 가능성을 위한 것이지 맹목적인 이윤 추구가 아 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즈니스는 재정적으로 유지가 가능해야 지속적으로 고객에게 유용한 제품 과 서비스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따라서 이윤은 비즈니스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즈니스의 목적이 이윤에 있다고 말할 수 는 없다. 마치 인간이 먹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에 먹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인생의 목적이 먹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업을 통하여 사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다. 사회에 유 익을 준다하면 사람들은 쉽게 봉사나 기부를 생각하지만 사회에 유익을 끼치는 방법은 다양하다. 현 대 대량생산의 아버지라 부르는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양산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자동차를 만들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동의 편리함은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만든 아이폰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스마트 폰의 시효 제품)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유용성을 가져다 주 었다. 기업이 사회에 주는 유익은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캘커타에서 프리셋(Freeset)이라는 BAM 기업을 운영하는 힐튼 부부는 기업을 운영하여 매 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함으로 그 매춘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주께로 나
아오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는 ‘빵을 팔기 위하여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하여 빵을
판다’고 한 어느 사회적 기업의 모토처럼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가난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일자리 를 제공하여 사회에 주는 유익의 예라고 할 수 있다.
BAM 기업의 목적이 돈 버는 것에 있지 않고 사회에 유익을 제공하는데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BAMer에게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식이 없이는 총체적 선교를 감당하려는 BAM 기업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보다 돈만 밝히는 자본주의의 천한 모습만 보여 주게 될 것이며, 이는 우리가 전하는 복음마저 천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2. 이원론과 이분법적 세계관의 극복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던 로잔 3차 대회의 결과물인 케이프타운 서약(The Cape Town Commitment)에선 “성속의 분리라는 허위(falsehood of a ‘sacred-secular divide)가 교
회의 사고와 행동에 침투해 들어왔다.”고 선언한다. 성속의 분리는 초대 교회 시대에 교회 안에 들어 온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종교적인 활동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이고 반면에 성도 개인의 삶을
위한 직업이나, 사회활동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이원론에 의한 것이다. 사
실 성경은 우리가 각기 다른 소명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며 우리의 삶 전체가 사역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이원론에 의한 성속의 분리는 케이프타운 서약에서 말하는 것처럼 허 위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여전히 성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으며 심지 어 이원론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 성도들 속에서도 여전히 이원론적 사고와 행동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필자가 이렇게 이원론의 문제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원론이 BAM을 실천하는데 아주 강력한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 BAM을 이야기하면 어떤 분들은 ‘비즈니스는 세속적인 것이고 선 교는 거룩한 일인데 어떻게 그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고 묻기도 한다. 이는 성속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이원론적 질문이다. BAMer가 이러한 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즈니스를 세속적인 것 으로 여긴다면 그는 비자를 얻기 위해 할 수없이 하는 비즈니스에 집중할 수 없어서 결국 비즈니스 를 접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성공한 BAMer들의 고백들 중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가 아내로부터 ‘이만큼 비즈니스 했으면 이제 선교하자’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분들은 ‘BAM을 하면 비즈니 스 하는데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에 선교에 집중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은 이 원론의 영향으로 선교(복음전도)와 사회변혁을 구분한 이분법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이
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무엇이 우선이냐는 논쟁이 일어나고 결국 복음전도를 통한 영혼구원이 우선이고 다른 모든 일들 즉 비즈니스는 이를 위한 도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주
의 운동의 대표격인 로잔 언약에선 ‘복음 전도의 결과는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과 그의 교회로의 연 합, 그리고 세상에서의 책임 있는 섬김을 포함한다. … 사회 참여가 복음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 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복음 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 분임을 확언한다.’라고 선언함으로서 복음 전도와 사회변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시도를 반대
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복음을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는 비즈니스가 BAM임
을 인식하고 이분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비즈니스와 미션 어느 하 나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고 BAM의 기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3. 비즈니스 계획을 작성하는 훈련
품질경영 교과서에서는 일본 기업이 미국 기업보다 경쟁력을 갖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QFD(Quality Function Deployment)임을 소개한다. QFD의 내용은 고객의 필요를 채우는 기능 들을 제품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도표를 통해 그려보고 해결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QFD
의 핵심은 제품을 만들기 이전에 이를 도상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해 본다는 것에 있다. 일단 실행을
해 보고 문제가 생기면 수정한다는 자세는 수정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많은 비용을 지불하게 되어 기업에 심각한 손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미리 상상해서 도상에서 연습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실제 상황에서 벌 어질 일들에 대해 충분히 고려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줄어들고 문제가 발생한 경우에도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이다. 치밀한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단 시작해 보는 비즈니스는 자칫 투자금을 모두 잃는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미리 계획서를 짜보고 검증의 과 정을 거쳐야 하며 그 검증도 주변 사람들에게 ‘어때 잘 될 것 같아?’라는 질문으로 하는게 아니라 전 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물론 계획서를 잘 만들고 검증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획이 없고, 검증의 단계가 없으면 실패한 후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파악할 수 없고 그저 운을 탓할 수밖에 없다. 계획이 있으면 비록 실패한다 해도 그 원인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파악 할 수 있고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필자가 관계하고 있는 네오모라비안하우스에서는 교육생들이 비즈니스 플랜을 만들고 발표하 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창업학교에서도 실행하고 있다.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멘 토링을 하다 보면 초기에는 뭘 해야 하는지도 몰라 당황하지만 검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비즈니스 플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그들의 사업 계획을 듣다 보면 황당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저 남들이 이런 사업을 한다니까 또는 이런 사업이 잘 된다더라 하는 식의 접근을 하는 경우가 대 부분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하는 비즈니스는 망하기 쉽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음식 을 잘하니까 식당을 차리면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비즈니스를 하면서 자신이 잘하는 것 또는 즐거워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면 무엇보다 우선되 어야 할 것은 고객의 필요나 원함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물건도 고객 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 팔리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사업은 망하게 된다. 시장의 필요를 알고 적 절한 사업을 시작해도 자금 계획이 잘못되어 사업을 접게 되는 경우들도 있다. 많은 경우 창업자금 을 생각할 때 지금 당장에 필요한 자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업은 그 사업 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일정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 기간은 이익은 나지 않고 오히려 운영자금만 들어가기에 이 기간을 버틸 자금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 시장의 상황이 예측한대로 가지 않아 어려 움을 겪을 때도 있기에 이를 대비한 자금이 필요하기도 하다. 때론 비즈니스의 논리에 함몰하다 보면 BAM을 하는 근본 목적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나 실수하는 부분 들은 비즈니스 플랜을 만들고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 바로잡게 된다. 필자도 네오모라비안하우스의
멘토링을 하다 보면 많은 교육생들이 비즈니스 플랜을 통해 비즈니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 다. 따라서 필자는 BAMer가 되려면 반드시 이러한 훈련의 과정을 밟을 것을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 네오모라비안하우스 커리큘럼과 진행 결과
네오모라비안하우스의 교육 철학은 총체적 선교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 나라 의 복음에 기초한 총체적 신학적 관점이 BAM 선교의 기반이 된다. 자연과 인간과 문화는 하나님의 구속적 미래를 믿는 현재적 믿음 가운데 선한 것이다. 비즈니스와 경제활동이 종교적인 활동에 귀속 되지 않는 독립적 문화로서 선하고 귀한 것임을 믿는 믿음으로 교육을 진행하고자 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삶이 BAM선교의 목 적이 되어야 하며, 비즈니스의 현장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제자도의 삶이 바로 복음의 선포이며 제자훈련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선교에 기초한 선교학적 기반이 BAM 선교의 기반이 되며 만물 가운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선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비즈니스 현장 가운데 우리의 소 망이 됨을 믿는다.
네오모라비안하우스의 커리큘럼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BAM 선교 이론 분야로 앞에서 언급한 비즈니스에 대한 오해와 성속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강의들이고, 다른 하나는 창업 계획서 작성을 위한 경영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들이다. 30분짜리 동영상 2개를 한 모듈로 하고 모두 24모듈 중에 BAM 선교이론 분야가 10모듈이나 된다. 사실 24모듈을 모두 창업과 관련한 내 용으로 채워도 부족한 시간인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BAM 선교이론에 배당한 것은 비즈니스를 바 라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고는 총체적 선교를 지향하는 BAM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네오모라비안하우스는 2016년 여름에 주중 낮시간을 활용하여 4주간의 교육을 함으로 1기를 시작하였다. 2017년 여름 같은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후 해외에 있는 선교사들이 국내 에 4주간을 들어와서 훈련을 받는 것에 대한 부담이 크다라는 의견이 있어서 ‘학생이 오기 어려우면 학교가 학생을 찾아가자’라는 마음으로 2주 합숙 프로그램으로 구성하여 2018년 여름 필리핀 세부 에서 3기 훈련이, 2019년 여름은 태국 방콕에서 4기 훈련이 진행되었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상황 으로 훈련과정을 열지 못하다가 2022년 1월 온라인과정으로 5기 훈련을 진행하였으며 2023년 1월 에는 온/오프라인 과정(강의는 동영상 시청, 창업계획서 작성을 위한 멘토링은 온/오프라인)으로 6 기 훈련을 진행하였다. 아래의 표는 5기까지 훈련을 마친 사람들 중에 실제 창업에 이른 결과이다.
| 참여 | 창업 | 청년창업비율 | |
| 1기 | 14 | 3 | |
| 2기 | 9 | 1 | |
| 3기 | 9 | 3 | |
| 4기 | 11 | 5 | 1/1 |
| 5기 | 9 | 4 | 2/2 |
5기까지만 표를 만든 것은 6기는 아직 결과를 말하기 이른 감이 있어서이다. 매번 훈련 과정을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은 선교지에서 비즈니스로 사역 전환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선교사들은 많은 데 막상 수강료를 내고 등록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역비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기에 비용 부담이 클테니 운영비를 펀드레이징을 통해서 확보하고 등록비를 현저히 낮추어 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배우는데 있어서 재정적 투자를 하는 것도 비즈니스의 한 과정이라고 여겨져서 등 록비를 받는 것을 고수하고 있다. 표에서 보면 수료생들 중에 실제 창업을 한 비율이 높지 않은데 이 는 선교사들이 창업 교육을 받았지만, 소속 단체의 반대, 창업 자금을 만드는데 어려움, 비즈니스 아 이템을 정하고 실행하는데 망설임 등의 이유로 실제 창업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이 된다. 하 지만 4기와 5기때 선교사가 아닌 국내 거주 청년들이 참여를 했는데 이들은 모두 창업을 실행해서 대조가 되기도 한다.
- 나가면서
네오모라비안하우스를 운영하면서 계속적으로 들어왔던 말은 ‘선교사들에게 비즈니스 마인드 를 심어주는 것은 너무 어렵다. 차라리 비즈니스 맨들에게 선교 마인드를 심어 선교지 창업을 하도 록 이끄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였다. 하지만 오늘날 선교지의 현실은 이미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전 통적인 사역으로는 현지에 남아 있을 수가 없어서 BAM으로 사역의 방향전환을 해야 하는 압박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들이 선교지를 철수해서 들어오는 것만이 대책일 수는 없고 이들 중에서 훈 련을 통해 비즈니스 마인드를 심어 좋은 BAMer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여 기 회를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 또한 현지에서 창업을 해서 성공하려면 현지의 문화와 관습을 잘 이해 하는 것이 필요한데, 새로운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 이미 현지를 이해하고 현지인과 친구가 되어 있는 선교사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려면 고객을 사랑하 고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보다 현지인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인 선교사가 비즈니스를 성공시킬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창업훈련을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계속되 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또한 선교지에서 비즈니스를 창업하여 운영하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발생한다. 창업도
어렵고, 지속해 나가는 과정도 어렵다. 어쩌면 성공해도 문제, 실패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성공하면 이익의 사용과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실패하면 책임 소재에 대한 문제로 선교사 또 는 비즈니스를 지원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할까 염려하 는 선교단체들은 소속 선교사들이 비즈니스 창업을 하는 것을 반대하거나 책임소관이 아닌 것처럼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대하는 것은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 되고, 방치하는 것은 더 큰 문제 를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함께 힘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 예상되는 문제에 대처할 방안들을 찾고 선 교지에서 창업하는 선교사들을 도와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IBA는 이러한 일을 위한 연합체이 고 지금까지 BAM에 관한 여러 가지 경험과 지식을 축적해 왔기에 BAM을 실행하려는 선교단체나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세기의 전략적 선교리더십 파라다임: Tent Maker: 전문인 선교사 (Busionary) / 임경철 총장(AGST-Pacific)
서 론: Tent Maker (Busionary)의 개념:
Busionary = Businessman + Missionary : 전문적인 직업인 동시에 자비량선교사
크리스찬의 직업관: John Calvin; 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천직 (Vocation)
William Carey: “내 직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 전문인 선교사의 정의
전문인 선교사란,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는 모든 근로자(직업인)가 타문 화권에서 생활 가운데 선교하는 방법으로 선교하는 자를 말한다. 여기서 전문인(professional)이라 고 하는 것은 선교 현장의 필요성(felt need)을 채워 주는 모든 직업의 전문성을 가진 직업을 의미한다.1
- 2. 전문인 선교의 필요성
오늘날 세계 선교사의 85-90% 이상이 전문인 선교사로 구성되어 있다. 평신도들은 앞으로 미전 도 종족을 향해 선교사들로 나갈 사람들이다.2
이들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문인 선교사들은 타문화권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다. 전문인 선교사들은 어 느 지역이든지 자연스럽게 현지인들과 접할 수 있고, 또 동일한 삶의 현장에서 동료로서 만나기 때문 에 신뢰의 바탕 위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들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 양한 계층의 현지인들을 접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외교관은 현지의 외교관들을 접할
1 김태연, op. cit. 46.
2 손사무엘, “전문인 선교사의 오늘과 내일,” 전문인 선교, (1993년 봄), 2.
수 있고, 의사는 현지의 의사나 의대생을, 상사 주재원은 그에 맞는 지도급 인사들을 접할 수 있다.3
둘째, 목사나 선교사의 신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어떤 나라에도 전문인 선교사들은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비자(VISA)를 취득하여 들어갈 수 있다. 오늘날 10/40 window4에 집중되어 있는 미전도 종족은 약 11,000여 종족, 23억 명에 이르고 있다. 회교권, 힌두교권, 불교권, 그리고 공산권들이 이 에 속하며 이런 지역에 전문인 선교사가 필요하다.5
셋째, 막대한 선교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21세기 선교의 문을 열면서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 하려고 할 때, 교회의 후원에 의존한 선교사 파송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따라갈 수 없게 됐다. 선교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전문인 선교사를 양성하여 파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6.
넷째, 전문인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큰 선교 자원이다. 한국교회의 98%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직 장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세계선교의 비전과 선교의 동기를 심어주어 선교 동원가로 준비시킨다면 적어도 100만 명의 선교사들을 전 세계에 파 송하여 주님의 지상 대위임명령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7
다섯째, 전문인 선교사는 자기 자신의 직업에서 얻는 성취감과 만족을 통해, 사역의 실패로 겪는 좌절과 실망을 극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전임 선교사는 사역의 열매가 적거나 없으면 심한 좌절과 패배감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전문인 선교사는 자신의 직업과 일을 통하여 간접선교를 할 수 있는 데, 이러한 성취감과 만족감으로 인하여 계속하여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역 의 결과에 매달리지도 않아도 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8
여섯째, 전문인 선교사는 부득이하게 귀국하게 될 경우 본국에서도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유학생의 경우 유학기간과 유학 후의 현지에서 계속적인 선교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귀국하게 되더라도 그가 얻은 학문적 지식과, 선교적 경험을 통해 본국에서도 전문인 선 교사들을 훈련을 시킬 수 있고 더 유익한 일들도 할 수 있다.9
이상으로 전문인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생각한다면 전문인 선교사의 역할은 더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전문인 선교는 21세기 선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이사무엘, “평신도 선교사의 역할,” 한국선교총람, (1996), 154.
4 10/40 window은 선교단체들이 규정하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북위 10~40도 사이에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 창 지역은 사하라 사막과 북부 아프리카,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 세계 인구의 2/3가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 용어는 1990년 선교 전략가인 루 이스 부시에 의해 만들어졌다.
5 이사무엘, 평신도를 부른다, 제1권 (서울: 성광문화사, 1999), 199.
6 Idem.
7 Ibid. 200.
8 Ibid. 202-203.
9 Ibid. 203.
- 전문인 선교사의 성경적 근거
-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목축을 하면서 큰 부를 축적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애굽왕 바로에게서 많은 양 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양대를 얻었고 아비멜렉으로부터 양과 소와 노비를 받았다. 후에 그는 318명 의 사병을 거느릴 정도가 되었고, 한 무리의 족장 곧 소왕국의 왕이 되었다.10
아브라함은 선교지인 가나안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 먼저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 님의 거룩한 족속임을 상기시켰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 성이 4개국 연합군에 패하였을 때, 연합군을 물리치고 그들을 구원해 주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 문제를 가지고 하나 님께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악한 백성 사이에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선교사의 모습을 보게 된다.11
- 사도 바울
바울의 경우는 전문인 선교사로서 가장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의 직업을 선교 적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바울과 그의 선교팀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았지만 그 교회가 바울의 선교비를 전액 후원했다는 기록은 없다. 바울은 아마도 스스로 선교비를 모았던 것으로 보인다(행 20:34). 그의 전문인 선교 사역은 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한 모범을 부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 울은 그의 직업을 통해 주는 삶의 모범과 근면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려 하였다(행 20:35; 살후 3:6). 또한 바울은 영적 지도자 훈련을 위한 선교적 수단으로 그의 직업을 사용하였다. 사도행전 18장에 서 제 2차 선교여행 도중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된다. 종교적, 인종적, 문 화적 배경이 같았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도 있었겠지만 직업 또한 같았기 때문에 수월했던 것이다 (행 18:3). 그들은 바울과 함께 선교를 떠났고 바울에게 훈련을 받았다. 후에 그들은 천막 깁는 자들 에서 충성되고 생명을 다해 주를 섬기는 교회지도자로 성장하였다(롬 16:3, 4). 이와 같이 바울이 탁 월한 교회 지도자들을 짧은 시간 내에 훈련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함께 밤낮 일하고, 그의 전 삶을 함께 나눔으로써 말씀과 삶으로 가르쳤기 때문이었다.12
- 전문인 선교사의 선교역사적 근거
- 모라비안 선교회
10 이사무엘, op. cit. 107.
11 Ibid. 108.
12 문바울, 텐트메이커 선교의 성경적 모델 – 바울 사도의 선교, 텐트메이커 선교 그 이론과 실제 (서울: 도서출판 펴내기, 2001), 30-34.
모라비안 선교회는 전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실천한 최초의 개신교 교회였다. 형제회(The United Brethren)은 모라비안 선교회의 전신으로 1457년 쿤발트 (Kunwald) 마을 리티쯔(Lititz) 성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 후 많은 박해 와 핍박으로 인해 1722년부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베르셀스도르에 들아와 자유로운 신앙공 동체를 이루게 되었다.13
1732년 서인도 제도로 파송된 레오나르도 더비(Leonard Dober)라는 토기장이와 데이빗 니치 만(David Nitschmaun)이라는 목수는 모라비안 선교회에서 파송된 첫 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은 무 역을 하면서 생활비를 모으고 희생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그 후 17년 만에 2천 명의 신자가 생겼고, 1879녀에는 41개 지부, 78명의 선교사와 36,698명의 신자가 생기게 되었다.14
1736년에는 모라비안 선교사 조지 슈미트(George Suhmid)에 의해 아프리카 선교가 최초로 시 작되었다. 그는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지 7일만에 네델란드를 거쳐 아프리카 최남단 호텐 토트 지방으로 갔다. 결국 그의 믿음과 수고로 인해 1742년 세례명이 윌렘(Willem)이라는 사람이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크리스천이 되었다. 1882년에는 동부와 서부 두 지역에만 25개의 학교와 250 명의 학자, 14개 지부, 11,704명의 세례교인을 얻게 되었다.15
이처럼 모라비안 선교회는 여러 곳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으며 선교지에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 면서 현지인들과 함께 했다. 결국 그들의 헌신과 사랑에 의해 현지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으며 결국 수많은 크리스천이 생기게 되었음을 보게 된다.
-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
오늘날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캐리는 “내 직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구두 를 만드는 것은 단순히 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구두를 만드는 것도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업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과 형 태는 다른 것일지라도 의미는 같은 일이라고 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 가서 식물 재배 농장 감독자 로 있으면서 벵갈어를 익혀 5년 만에 신약성경을 번역, 완성하고, 교사 출신 조슈아, 인사관 출신 윌
리엄과 동역하면서 신 ‧ 구약성경을 6개, 서로 다른 언어로 신약을 23개, 쪽복음을 10개의 방언으로 출판했다.16
뿐만 아니라 구두닦이였던 그가 푸트윌리엄 대학의 언어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역을 수 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텐테메이킹을 기본 원리로 생각해 온 터이므로, 실천 가능할 때에 는 언제든지 선교사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생활비와 선교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담당해야 된다.”고
13 UBF 교재연구부, 위대한 선교사들 (서울: UBF 출판부, 1990), 140-145.
14 Ibid. 147-148.
15 Ibid. 150-151.
16 한국전문인선교협의회 엮음, 선교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서울 :도서출판 창조, 2000), 52.
말했다. 이러한 윌리엄 캐리의 삶 속에서 그이 개척 정신과 선구자적인 선교 방법론을 배우게 된다.17
- 전문인 선교사의 한국 선교역사적 근거
- 호레이스 알렌 (Horace Newton Allen, 1858–1932)
1884년 한국교회 선교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선교사들이 전문인 선교사로 입국한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의사로 입국해 선교사역을 했던 알렌의 경우 전문인 선교사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알렌은 1881년 중부의 명문 오하이오의 웨슬리안 대학(Ohio Wesleyan University)을 졸업하 였다. 그 후 1년간 콜롬버스(Columbus)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다시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과대학 (Miami Medical College)에 진학해 학업을 마치고 1883년에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그해 여 름에 중국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나 아내의 건강 악화와 선교 경험의 미 숙,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 등 환경이 여의치 않자 선교지를 옮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핸더 슨 박사(Dr. Henderson)의 권유로 1884년 9월 20일 제물포 항에 도착해 한국선교의 첫 발을 내딛
게 되었다.18
알렌이 입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명성 왕후의 조카이자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은 개화파의 자객의 칼에 일곱 군데나 찔리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알렌은 민영익의 치료를 맡았고 모든 노력을 다해 극진히 치료해 주었다. 결국 민영익 은 건강하게 회복되었고 이 일로 인해 알렌은 현금 10만 냥과 정2품에 해당하는 참판의 벼슬까지 받 게 되었다.19
이것은 알렌이 민영익뿐만 아니라 고종과의 원만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서양의학 기술을 소개하 고 직접 선교 할 수 있는 최초의 서양병원인 광혜원의 설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전기가 되었 다. 알렌은 서양병원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885년 4월 10일 은혜를 널리 베푸는 집이라 는 뜻으로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은 개설된 지 16일 만에 제중원으로 개명되었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어 자연스럽게 한국개신교 선교의 거점이 되어 선교의 효과 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20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알렌은 의사라는 전문인의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해서 1887년 선교사직 을 사임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육신의 병을 치료해 줄 뿐만 아니라 여러 선교사들과의 협력 속에 서 전문적으로 선교사역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17 Idem.
18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제1권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370-372.
19 Ibid. 385-387.
20 Ibid. 387-389.
- 말콤 펜윅 (Malcom C. Fenwick, 1865–1935)
펜윅은 1865년 캐나다 토론토의 북쪽 마캄에서 태어나 온타리오의 프라이즈 농장(Prige Farm) 에서 일하면서 농업기술을 익혔다. 그는 선교의 열정과 성경과 성령의 능력만을 믿었다. 그는 대학교 육이나 신학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21
그는 1896년 한국 전통의 우월성까지 찬양하면서 한국인을 기용한 아주 파격적인 선교에 임하 였다. 펜윅은 솔내에서 알았던 김씨를 만나자 김씨는 선교 동역자로 얻고, 신명균이 공주에서 사역하 도록 도왔다. 신명균은 자기 집을 하나 마련하라고 준 돈 50불을 자기가 채용한 전도자 파송에 쓰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얼마 후 10여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22
펜윅은 자신이 두만강 넘어 간도나 시베리아 지역을 여행하고 선교한 것은 1910년 4월이었다. 또 한 강경에서 성서 연구회를 열어 50여명의 전도인을 사방에 파송하였는데 그 중 9명이 두만강 건너 편에 파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간도, 만주, 시베리아, 몽고까지 선교하여 침례교의 찬란한 역사의 깃발을 휘날리기까지 하였다. 순교자도 많이 내었다.23 이것은 그가 한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품었 기 때문이요, 성경과 성령으로만 선교하였던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을 앞세운 선구
적 선교사로‘토착화의 한 거보’로서 그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24
- 전문인 선교사의 한국 현대선교역사적 근거
-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 University Bible Fellowship)
U.B.F.는 자비량 선교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선교기관이다. 이 모임은 1961년 이사무엘 박사(현재 시카고 U.B.F. 세계본부에서 활동, 본 회 회장)와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받은 Mother Sarah Barry 선교사(현재 시카고 U.B.F. 세계본부에서 활동)에 의해 전남 광주에서 시작된 자생적 학생운동이다. 그 후에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 급속도록 성장하였다. 1976년까지 그들은 157 명의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선교지로 파송되기 전에, 그들은 적어도 6개월간 집중 적인 선교후보훈련을 받는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은 그들의 전공과 관련된 정규 직장을 얻어 자립 을 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립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이사무엘 회 장은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을 심방하여 돕고 있다.25
U.B.F.는 현재 전국의 대부분의 캠퍼스에서 약 1만 여명의 대학생과 학사들이 주축을 이루어
21 민경배, “말콤 펜위크의 한국선교,” 현대신학, 제17집 (1993년 12월) 60.
22 Ibid. 70-72.
23 Ibid. 74-76.
24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146.
25 이현정, “평신도 자비량 선교에 관한 신학적 연구,” (1997),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70-71.
활동하고 있으며, 해외에는 90개국 1,450명의 훈련된 전문인 또는 유학생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약 300여 명의 박사(Ph.D)학위를 가진 선교사들과 지도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다.26
- 그루터기 해외선교회
그루터기란 베임을 당하고 버려진 밑 둥지로서 쓸모 없다고 버림당함으로 이 땅에 비천하게 남 은 저변층을 상징하는 성경 말씀이다(사 6:16). 그루터기 선교회는 1976년 12월에 한국 직업청소년 선교회로 출범하여 지금까지 꾸준히 사역하고 있는 선교단체이다.27
본 선교회의 특징은 한마디로 기능인 자비량 선교이다. 기능인 자비량 선교를 통해 원주민과 삶 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 팀 선교이다. 원주민들과 함께 더불어 살면서 기능을 전수하는 가운데 복음 을 전하는 사역이다. 이처럼 기능인 자비량 선교는 바로 일터의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방 법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그 땅과 문화를 정복하여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루는데 그 비전을 두고 있다.28
- 그 외 많은 선교단체들
전문인 선교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전문인 선교사를 훈련시키는 기관들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내 전문인 선교 사역 단체로서는 갈릴리세계선교회(GWM), 모퉁이돌선 교회, 순회선교단, OMF KOREA, 오병이어선교회, 인터콥, GPTI, 중국어문선교회, 중동선교회, 치과의료선교회(DMC), 한국누가회(CMF), OM(한국오엠국제선교회), HOPE(사단법인 한국해 외선교회 전문인협력기구) 등 여러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29
- 7. 전문인 선교사역의 영역들
전문인 선교사역이 필요한 영역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지 교회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지도할 선교사이다. 평신도 선교사가 목사 선교사와 함께 또는 그 아래서 개인 또는 소그룹으로 제자양육으로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30
둘째, 선교지의 어린이 교육을 감당할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이다. 어린이 교육은 조기의 효과를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직접 교육하고, 또한 현지 지도자들을 키워야 한다.31
26 [온라인] http://www.ubf.or.kr/intro/intro.html
27 이현정, op. cit. 73.
28 Idem.
29 한국전문인선교협의회 엮음, op. cit. 245. 한국 내 전문인 선교 사역단체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부록편에 보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30 강승삼, 21세기 선교 길라잡이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8), 122.
31 Idem.
셋째, 의료 선교사이다. 의료 선교사라 하면 의사, 조산원, 임상병리사, X-Ray 기사, 약사, 간호사
등을 포함한다. 이들에게는 세 가지 사역이 있는데 첫째는 치료사역, 둘째는 현지 의료진들을 훈련 시키는 사역, 셋째는 제자훈련 사역이다. 의술과 함께 복음을 심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 사역은 영 적인 사역이다. 현재 의료 선교사를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곳은 페루, 라오스, 아프리카 등이다.32
넷째, 지역개발, 농촌개발 선교사이다. 아프리카를 포함한 많은 선교지에는 기근과 영양실조, 식 수난, 환경오염 등이 심각하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과 함께 병자를 고치셨고, 가난한 자들에게 떡 을 먹이셨다. 현재 한국 선교사들 중에 극소수가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의 지역개발, 농촌개발을 위 해 묵묵히 수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 더 많은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33
다섯째, 기술 또는 행정 선교사이다. 건축기사, 정비 기술자, 컴퓨터 전문가, 회계사, 기타 행정 요 원 등의 선교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전문직 선교사는 한 국가에 장기적으로 파송되기보다는 선교지 원팀으로 선교본부에 소속되어 필요한 지역으로 파견되어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34
여섯째, 한인선교사 자녀 교육 선교사이다. 한국교회는 2010년이 되면 선교사 숫자가 2만 명 이 상이 될 것이고 선교사 자녀수 또한 급증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선교사의 자녀 교육 선교사가 필 요한 시점이다.35
일곱째, 사업가 등의 자비량 선교사이다. 한국 기업은 제 3세계에 진출해 그 지역 사람들을 고용 하고 있다. 그러한 전략적인 곳에 소명받은 평신도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36
여덟째, 선교지 정부의 공직자, 주요 기관의 요원 등의 평신도 선교사이다. 전문직에서 정년 퇴직 한 평신도들도 단기 자비량 선교사가 될 수 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한 사람이 팀 요원이 될 때, 힘있 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평신도 해외 사역자는 목사 선교사보다 훨씬 더 많이 요구되고 있고, 계속해서 파송될 것이다.37
- 실제 사례: 한국어교수와 중국 대학교
- 중국내 한류 열풍
- 한류의 의미
‘한류(韓流)’의 어원은 역사적 과정에서 한류 이전 중국 대중문화의 큰 유행을 이끌었던 일본 문화의 전례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 1980년대 일본 문화가 급속히 밀려들어오는 현상을 일컬어 ‘일류
(日流)’라고 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한류는 한국에 대한 일종의 유행 현상인 것이다. 중국에 서는 한류를 ‘한국열(韓國熱)’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한풍(韓風)’, ‘한국풍(韓國風)’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단어들은 아직 명확한 구분을 가지고 사용되지는 않고 있는 실정이다.38
여기서 ‘류(流)’는 ‘조류’나 ‘유행’에서처럼 ‘흐름’이나 ‘전파’의 의미로 쓰이므로 ‘한류(韓流 潮流)’ 는 즉 ‘한국 대중문화 물결’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여기서 ‘물결’은 사람들이 이루는 커다란 흐 름을 뜻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루어내는 바람, 열기 등의 말과도 상통하는 뜻을 갖는다. 그래서 ‘한국대중문화바람(열기, 열풍)’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39
- 한류의 유래
한류의 유래를 살펴볼 때 크게 드라마와 노래를 통해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언 론은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현상을 보도함에 있어서 ‘한류(韓流)’라는 용어를 인용함으로써 한류가 중국에서 한국의 유행을 통칭하는 보통 명사가 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2000년 9월 중국의 인민 일보는 한국 가수들의 대형 콘서트 개최를 보도하면서 한국 음악의 유행이라는 의미로 ‘한류(韓流)’ 라는 신조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중국 내에 일어나고 있는 한류 열풍의 실제를 인정하며, 또한 한류 가 중국에서 공식 용어로 정착하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40
- 드라마와 영화
지난 몇 년 간 중국에는 우수한 문학고설이 외면을 당하고 대신 드라마가 크게 각광을 받는 경 향이 나타나고 있다.41 2001년 말 중국의 WTO 가입으로 인해 텔레비전은 케이블 TV, 위성 방송, 외국 방송과 인터넷 방송 등이 경합을 벌이면서 상대적 과잉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급성장 가도에 있어서 그 콘텐츠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틈새시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1997년 중국의 CCTV에서 방영한 한국 TV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큰 인기를 얻은 것 을 시작으로 <의가형제>, <별은 내 가슴에>, <이브의 모든 것>, <호텔리어>, <가을동화>등의 청춘 드 라마가 대거 중국으로 수출되어 방영되었다. 방영된 대부분의 장르는 TV드라마였으며 장동건, 안재 욱, 김희선, 배용준, 송혜교 등의 한류스타를 배출하게 되었다.42
- 2. 가요
38 조혜영 손미정 최금해, 중국 청소년들의 한류 인식 실태에 관한 연구 (서울: 한국청소년개발원연구보고서 2002), 9.
39 Idem.
40 이치한 허진, “한류 현상과 한 중 문화교류,” 지역발전연구, 4 (2002년 9월) 506.
41 런민르바오(人民日報) 해와판 인용보도, 베이징저널, 2001년 11월 16일.
42 유세경 ‧ 고민경, “한국 TV 드라마와 시청행위와 한국과 한류에 대한 태도 관계 연구: 중국 대학생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2006) 54-55.
한류라는 용어의 등장은 1999년 문화관광부가 해외 한국공관에 배포할 목적으로 가요의 홍보
용 음반을 CD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음반의 타이틀을 새로운 휴행 경향을 총칭히는 ‘한류(寒流)’라 는 신조어에서 ‘寒’을 ‘韓’으로 바꾸게 된 후43 그 해 가을부터 H.O.T, 안재욱, 유승준의 노래가 담긴 ‘한류(韓流)’라는 홍보용 한국가요 음반이 중국 전역에 배포되어 전파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44
TV 드라마로 한국의 대중문화가 안방을 공략하기 시작한 이후, 중국 정부의 정식 비준을 거쳐
공식적으로 한국 음반이 처음 발매가 되었는데 그 때가 바로 1998년 5월 바로 H.O.T의 음반이었다. 이후 1999년 7월 NRG가 발매한 음반도 10만장에 육박하고 있다.45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질 때 1999년 11월 북경 공인체육관에서 있었던 클론의 공연이 있었고 같은 장소에서 H.O.T의 공연을 무사히 치르면서46 한류는 커다란 흐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론의 공연을 계기로 ‘한류(韓流)’라는 용어가 매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 작하였다.47
- 한국어 교육의 역사
한국어 교육이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의사소통 능력의 함 양을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가르치게 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48
외국에서의 한국어 교육을 살펴보면, 크게 일본과 중국에서 그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일
본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신라어 교육’(761)이 실시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日本後紀’(815)에는 ‘신 라역어'(1727)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의 한국어 교육을 살펴보면, ‘당시 고려어 를 중국의 자음을 이용해 표기’(1163)했다는 내용이 있다. 마지막으로 19세기 후반 외국어서의 한국 어 교육을 살펴보면, 일본에 조선어 학습소가 설치(1872)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상트 페테스부르크 대 학에서 한국어 교육이 시작(1879)되었다.49
중국에서의 한국어 교육의 역사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중국에서의 한국학 연구의 역사는 1946년 중국의 난징동방어문전문대학에서 3명을 한국어학과를 개설하여 1948년에 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후 베이징대학에 조선어학과가 개설되었고 옌벤대학 조선언어문학과는 옌벤대학이 설 립됨(1949)과 동시에 조선족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르쳤다. 베이징경제무역대학 한국어학과는 1951 년에 뤄양외국어대학은 1956년에 설립되었다. 지금 뤄양외국어대학은 300여 명의 재학생과 30여 명
43 이치한 ‧ 허진, op. cit. 505.
44 이병환, “중국 대학생의 ‘한류’ 인식 실태와 그 의미,” 중등교육연구, 제53집 제3호 (2005년 12월), 143.
45 “중국에 한국가요 열풍,” 조선일보, 2000년 6월 28일.
46 “‘한류’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베이징칭니옌바오, 2001년 12월 9. 제11면.
47 “동풍도 동점할 때가 있다,” 베이징칭니옌바오, 1999년 11월 19일.
- Ibid. 3.
- I 3-4
의 석사과정, 그리고 20명 정도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있다.50
1992년 한 ‧ 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어 교육은 질적인 전환기를 맞게 된다. 한국이 국제 무 대에서 역할이 커지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 수와 대학의 한국어학과 수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1980년대까지 베이징대학, 대외경제무역대학, 뤄량외국어대학 등 일부에만 있던 한국어학
과가 지금은 4151개로 늘어났으며 한류 열풍에 힘입어 전국 각지에서 한국어학과가 계속 설립되고 있다.52
- 한국어 교육의 현황
- 국내
국내의 한국어 교육은 대학 부설 어학 기관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연세대 한국어학당(1959)이 최초로 생긴 이래 서울대 어학연구소(1969)가 한국어 교육을 시작하였고,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6), 이화여대 언어교육원(1988), 선문대 한국어교육원(1989)이 설립되었고, 이후 90년대 들어서 면서 경희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등의 부설 어학 기관에서도 생겨나기 시작했다.53
정부 관련 기관으로는 국제교육진흥원에서 재외동포 한국어 교육 과정을 설치(1962)하였고, 한 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협력단, 국립국어연구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등에서 실시하였다. 또한 가나다 학원, 코리아 헤럴드 부설 어학원 등 사설 학원이나 시민단체에서도 한국어 교육이 실시되었다.54
- 국외
미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강력한 외국어 교육 정책으로 한국어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 되었다. 한인 교회에서 한글학교를 운영하여 이민 1.5세와 2세들에게 가르쳤다. 1997년부터는 미국 대학 수학능력 시험인 SAT(Scholastic Assesment Test)의 선택 과목 SATⅡ에 외국어로서 한국어 가 포함되기도 했다.55 일본의 경우 2003년부터 일본 대입 수능 시험인 센타 시험에 한국어 시험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이것은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이어 5번째로 채택된 외국어이다. 호주 에서는 1994년부터 뉴 사우스 웨일즈(NSW)주와 빅토리아(Victoria)주의 대입 선택 과목으로 한국 어가 채택되었다.56 그리고 2020년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인도에서도 재2외국로 채택되어 중학 교 1학년부터 한국어를 가르치기로 결정하였다57는 기쁜 소식이 있고 베트남에서도 한국어를 제1외
50 한국국제교류재단 편, 해외한국학백서, (서울: 을유문화사, 2007), 58-63.
51 해외한국학백서에 의하면 한국어학과 대학은 전 세계적으로 총 55개국에 632개에 설치되어 있으며 중국에는 41개의 한국어학과가 있다.
52 한국국제교류재단, op. cit. 64-65.
53 김중섭, op. cit. 4.
54 Ibid. 4-5.
- Ibid.
- Ibid.
- https://kbs.co.kr/news/view.do?ncd=4507860, https://www.yna.co.kr/view/AKR20200731165400077
국어로 채택하여58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풍은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 중국 대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
현재 중국 대학교에 설립된 한국어과는 총 41개의 대학에 개설되어 있다.
| 국가 | 소재 대학 | |
| 중국(홍콩) | 1 | (강소성) 난징대학(남경대학) |
| 2 | (강소성) 난징사범대학(남경사범대학) | |
| 3 | (강소성) 양저우대학(양주대학) | |
| 4 | (광동성) 광동외어외무대학(광동외어외무대학) | |
| 5 | (길림성) 옌벤과학기술대학(연변과학기술대학) | |
| 6 | (길림성) 옌벤대학(연변대학) | |
| 7 | (길림성) 지린대학(길림대학) | |
| 8 | (북경) 대외경제무역대학 | |
| 9 | (북경) 베이징대학(북경대학) | |
| 10 | (북경) 베이징어언대학(북경어언대학) | |
| 11 | (북경) 베이징연합대학여유학원(북경연합대학여유학원) | |
| 12 | (북경) 베이징외국어대학(북경외국어대학) | |
| 13 | (북경) 베이징제2외국어학원(북경제2외국어학원) | |
| 14 | (북경) 중국전매대학(북경전매대학) | |
| 15 | (북경) 중앙민족대학 | |
| 16 | (산동성) 라이양농학원(내양농학원) | |
| 17 | (산동성) 랴오청대학(요성대학) | |
| 18 | (산동성) 산둥대학(산동대학) | |
| 19 | (산동성) 산둥대학웨이하이분교(산동대학위해분교) | |
| 20 | (산동성) 산둥사범대학(산동사범대학) | |
| 21 | (산동성) 옌타이대학(연대대학) | |
| 22 | (산동성) 옌타이사범대학(연대사범대학) | |
| 23 | (산동성) 중국해양대학 | |
| 24 | (산동성) 지난대학(제남대학) | |
| 25 | (산동성) 취푸사범대학(곡부사범대학) | |
| 26 | (산동성) 칭다오대학(청도대학) | |
| 27 | (상해) 상하이외국어대학(상해외국어대학) | |
| 28 | (상해) 푸단대학(복단대학) | |
| 29 | (섬서성) 시안외국어학원(서안외국어학원) | |
| 30 | (요녕성) 다롄외국어학원(대련외국어학원) | |
| 31 | (요녕성) 랴오닝대학(요녕대학) | |
| 32 | (요녕성) 랴오둥학원(요동학원) | |
[표 1] 중국 대학교내에서의 한국어 학과
또한 현재 중국의 많은 대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이 되고 있는 한국어 교 과 과정 편성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 국가 | 소재 대학 | |
| 중국(홍콩) | 33 | (천진) 톈진사범대학(천진사범대학) |
| 34 | (천진) 톈진외국어학원(천진외국어학원) | |
| 35 | (천진) 톈진외국어학원빈하이외사학원(천진외국어대학빈해외사학원) | |
| 36 | (하남성) 정저우경공업학원(정주경공업학원) | |
| 37 | (흑룡강성) 치치하얼대학(제제합이대학) | |
| 38 | (흑룡강성) 치치하얼사범전과대학(제제합이사범전과대학) | |
| 39 | (흑룡강성) 헤이룽장대학(흑룡강대학) | |
| 40 | (홍콩) 홍콩성시대학 | |
| 41 | (홍콩) 홍콩중문대학 | |
[표 2] 주요대학 한국어학과의 교과 과정59
* 상기 내용은 서울 시내에 소재하고 있는 기관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2004년 12월 현재 전국에 있는 대부분의 4년제 대학에서 한국어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음.
- 한국어 교육 기관
국내에 있는 한국어 교육 기관을 살펴보면 연세대 한국어학당(1959)에서 선교사를 위한 한국 어 교육을 시작한 이래 서울대 어학연구소(1969),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1986), 경희대 국제교육원 (1993), 숙명여대(1997) 등 1999년 현재 30여 개의 대학 부설 한국어 교육 기관에서 한국어를 실시 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60 국내에 있는 한국어 교육 기관을 보면 [표 3]과 같다.
이와 같이 한국어 교육 기관의 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며, 각 기관에 서 교육 받는 한국어 학습자 수는 2004년 현재 연간 10,000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숫자는 2학기나 4학기 등의 학제에 따라 중복된 숫자이며, 이를 제외할 경우 3,0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61
| 대학교 | 교과 과정 |
| 북경대 | 기초 한국어, 한국어 시청설, 번역, 한반도 개황, 문법, 신문 읽기, 문학 작품, 한국 문학사, 한국어 문체론, 한국어
방언, 한국어 발전사, 한국 경제, 한국 국제관계사, 한국 역사 |
| 대외경제
무역대 |
기초 한국어, 한국어 시청설, 청각, 정독, 경제무역 글쓰기, 문학 작품 읽기,
번역 이론과 실천, 한국 경제 무역문 읽기 |
| 연변대 | (천진) 톈진외국어학원빈하이외사학원(천진외국어대학빈해외사학원) |
| 복단대 | 기초 한국어, 중급 한국어, 고급 한국어, 한국어 시청설, 한국어 문법, 한국 한자, 번역,
한국 문학, 신문 읽기, 수사학, 한국어 글쓰기, 중한 문학 비교, 대외무역 한국어 |
| 상해
외국어대 |
기초 한국어, 읽기, 청각, 회화, 문법, 한국 문학사, 문학 작품 읽기, 글쓰기, 한국 언어학,
대외무역 및 관광 한국어 |
| 길림대 | 조선어 정독, 회화, 청각, 문법, 한국 문학사, 문학 작품, 조선 언어학, 쓰기, 한반도 개황, 무역 및 관광 한국어, 번
역 |
| 북경
제2외국어대 |
기초 한국어, 고급 한국어, 문법, 회화, 청각, 번역, 문학, 문화, 관광 |
| 흑룡강대 | 한국어 정독, 읽기, 회화, 시청각, 번역, 한국 문학사, 한국 문학 작품 읽기, 한국 개황,
한국어 개론 |
59 왕단, “중국어권 학습자를 위한 한국어 문법 교육의 현황과 개선 방향,” 국어교육연구, 16 (2005년), 298.
60 김중섭, op. cit. 331.
61 Ibid. 332-333.
| 기관명 | 개설연도 | 학생수 | 교재 | 특징 |
| 건국대학교
사회교육원 |
1998년 | 연인원 900 | 한국어 1‧2권 | 외국인
노동자/무료 |
|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 | 1993년 | 연인원 1500 | 한국어 초급Ⅰ‧Ⅱ, 중급Ⅰ‧Ⅱ, 고급Ⅰ‧Ⅱ,
혼자 공부하는 한국어 초급Ⅰ‧Ⅱ, 중급Ⅰ‧Ⅱ |
학기제/정부장학 생 |
| 고려대학교
한국학센터 |
1986년 | 연인원 1500 | 한국어 1-6, 한국어회화 1-6,
CD롬 교재 |
|
| 국제교육
진흥원 |
1962년 | 연인원
650-700 |
한국어Ⅰ-Ⅳ, 인터넷 교재 | 재외동포 |
| 서강대학교 | 1990년 | 연인원
800-900 |
서강 한국어 1-6, 워크북 포함 | |
|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 |
1969년 | 연인원
700-800 |
한국어 1-4 | |
| 선문대학교 한국어교육원 | 1989년 | 연인원 700 | 한국어 1-6, 한국어 실용회화 | 학기제/종교 |
| 성균관
대학교 |
1997년 | 연인원
600-700 |
배우기 쉬운 한국어 1-6 | |
| 숙명여자
대학교 |
1997년 | 학기당 50
5학기 250 |
숙명한국어Ⅰ(워크북 포함) | |
|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
1959년 | 연인원 3100 | 한국어 1-6, 한국어 독본 1-6 등 다양 | |
| 이화여자
대학교 |
1988년 | 연인원
1400-1500 |
말이 트이는 한국어(워크북)Ⅰ-Ⅳ(Ⅰ-Ⅳ), Exciting
Korean(듣기 교본) |
|
| 한국외국어
대학교 |
1991년 | 연인원
700-800 |
한국어 1-2 | |
| 한양대학교 | 1997년 | 연인원 700 | 자체 교재 |
[표 3] 국내에 있는 한국어 교육 기관62
- 한국어 교수가 되는 길: 자격 요건
1990년대 중반까지도 10여 곳에 불과하던 한국어 교육 기관은 현재 기관 수, 규모, 프로그램 측 면에서 매우 다양해졌다. 2004년 말 현재 대학 부설 기관은 70곳 정도, 이들 기관에 재학 중인 한국 어 학습자는 7,000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63
한국어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한국어 교육 전문가로서의 자격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연세대학교 한국어교사연구소, 서강대 한국어교육원, 이화여대 언어교육 원, 한글학회 등의 한국어 교사 연수기관에서 실시하는 2주 ~ 5주 과정의 단기 연수 프로그램과 방 송통신대의 6개월 과정의 한국어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방법이 있다. 또한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62 Ibid. 332.
63 [온라인] http://blog.naver.com/asdq1684/90009404769
외국어대, 경희대 등의 교육대학원에서 4학기 석사과정을 이수하는 방법이 있다. 대학원 과정은 주
로 비국어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단기연수과정은 대학총장 명의의 연수증이 발급되는 반면, 대학원 과정은 석사학위가 주어지는 정규과정이다. 한국어 교육을 통해 선교를 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이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선교지로 나가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대학강단에 서기 위해서는 최 소한 석사학위를 갖추어야 강단에 설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되며, 장기적인 사역을 고려한다면 석사과 정을 이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64
현재 국내에 개설되어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학위 과정 개설 현황(일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표 4]와 같다.
| 과정 | 학교 / 학과명 | 개설연도 | 학위 |
| 학부 | 한국외대 사범대학 한국어교육학과 | 1974 | 학사과정 |
| 경희대 동아시아어학과군 한국어전공 | 1999 | ||
| 숙명여대 국제한국어전문과정(연계전공) | 2000 | ||
| 배재대학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과 | 2003 | ||
| 대학원 | 이화여대 대학원 한국학과 한국어교육전공(세부전공) | 1982 | 석사과정 |
| 연세대 교육대학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전공 | 1983 | ||
|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전공 | 1997 | ||
| 경희대 교육대학원 한국어교육 전공 | 1998 | ||
| 고려대 교육대학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전공 | 1999 | ||
| 한양대 교육대학원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 전공 | 1999 | ||
| 한국외대 교육대학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전공 | 2000 | ||
| 2002 | |||
| 서울대학교 대학원 한국어교육 전공 | 2002 | 석사 · 박사과정 | |
| 2005 | 석사 · 박사과정 |
[표 4] 학위 과정 개설 현황(일부분)65
- 한국어 교수로서의 삶
중국의 대학에서는 늘어나는 한국어학과 교수가 필요할 경우 주로 한국진흥재단으로 요청한다. 해외선교에 뜻을 둔 대학의 국문학과 교수들은 한국학술진흥재단에 해외 파견 한국어 교수로 신청 을 해두면 요청한 나라와 대학으로부터 요청이 있을 때 우선적으로 선발되는 기회가 있다. 한국학술 진흥재단 외에도 외교부 산하의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서 한국어 교사가 필요한 나라로부터 신청을 받아, 한국어 교사에게 일정한 생활비를 지급하면서 2년간 파견하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64 김피득, 중국을 주께로, 75 (2002), 13.
65 [온라인] http://blog.naver.com/asdq1684/90009404769
한국어 교사 연수를 받았거나 석사학위를 가졌다면 한국국제협력단을 통해 한국어 교사로 파견될 가능성이 있다.66
베이징이 또는 상하이에 있는 오래된 학교들에서는 교환교수를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경력이 없 는 사람은 진출이 어렵고, 오히려 이제 막 개설된 대학에서는 아직 교원이 부족한 경우가 있어 진출 이 비교적 용이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대학에서 외국인 교수에게 약 3,000 위안(노동자 평균 급여 600~900위안)정도의 월급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는 중국 대학에서 정교수급에 해당하는 대우이기 때문에 실력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는 쉽게 초청받을 수 없다.67
- 한국어 교수로서의 장점
- 입국 비자 문제와 장기 체류문제의 해결
중국선교를 준비하는 선교사들은 보통 유학생 신분으로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계 속되는 감시로 인해 유학생의 경우 자주 비자연장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 방법 마저도 지 금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러나 교수요원으로 가게 되면 이러한 문제를 한 번해 해결할 수 있게 된다.
- 2. 자비량으로 선교비 해결
전문인 선교사로 가게 되면 현지에서 월급을 받게 된다. 교수의 월급은 성마다 차이가 있지만 약 3,000~4,000 위안 정도를 월급으로 받게 된다. 이 정도면 현지에서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 월급으로 선교비를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 교수로서의 영향력 극대화
대학 캠퍼스에서 교수의 역할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위치이다. 사제지간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학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위치를 최대한 활용한다면 제자 삼는 사역을 더 극대화 할 수 있고 지도자를 키우는데도 중요한 위 치가 될 것이다.
- 4. 한국교회 또는 파송기관과의 효과적인 연대 가능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중국 학생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먼저 현지에서 전도 하고 양육하여 제자로 훈련시켜 놓은 중국학생들이 한국어의 본 고장인 한국에서 석사와 박사학위
66 김피득, 중국을 주께로, 76 (2002), 8-9.
67 Ibid. 9.
를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면 한국교회 또는 파송기관과 연계해서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최소 한 5-7년 동안 제자훈련하여 지도자로 키워서 중국으로 재파송할 수 있다. 이러한 현지인 선교사 파 송 방법은 전통적인 서구적인 선교사 파송방법보다 훨씬 효과적인 21세기의 현지인 선교사 양성 및 파송의 방법이 될 수 있다.
- 언어와 문화적응기간이 없이 선교사역 바로 시작
한국어 교수로서의 전문인 선교사로 가게 되면 한국어 교육과정의 고급반에서는 한국어만 사 용하여 강의와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에 곧 바로 현지 학생들과 교제하면서 전도와 양육의 기회를 얻 을 수 있다. 또한 현지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많이 주어지게 되고, 학생들은 더 많이 배우고 싶어서 교수들과 함께 하길 원할 것이다.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 속에서 중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 빠른 속도로 적응하게 되고 이것은 곧 제자삼고 지도자를 키우는 사역으로 연결될 수 있다.
- 6. 헌신자들을 한국에서 신학교육 가능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제자로 삼아 훈련시키다보면 그 중에 지도자로서 가능성이 있는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을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내서 신학교육을 시킨다면 이들이 중국보다 앞선 한국 의 신학을 배운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 교회 지도자로 쓰임 받을 수 있다. 이들은 후에 한국 의 박형룡과 박윤선과 같은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7. 주택과 자녀 교육비 제공
대학교는 교수들을 위해 주택 또는 자녀 교육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혜택을 제공하게 된 다. 교수들은 이것을 누리게 되고 이것은 결국 대학교라는 큰 테두리 속에서 신변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게 된다.
결론
당나라의 경교로부터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를 가진 중국 교회는 그 동안 수많은 핍박과 시련을 겪으면서 견뎌왔다. 특별히 한 ‧ 중 수교 이후로 현재까지 지속적인 선교의 많은 열매들을 하나님께 서 허락하셨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선교사역을 바라볼 때 우리가 좀 더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계
획을 세워 선교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결실을 맺지 않았겠나 생각해 본다. 급한 성격의 한국 정서가 지금까지 중국선교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면 이제부터는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방법으로 선교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당나라의 경교에서부터 시작된 중국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서 수많은 핍박과 시련 속에 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중국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대학 캠퍼스를 바라볼 때 젊은 지식인들을 미래의
중국교회 지도자와 국가의 크리스천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전략적인 선교 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1세기 중국 선교전략으로서 중국의 정치적 ‧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가장 적합 하다고 생각되는 전문인 선교사로서 한국어 교수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문인 선교의 장점과 선교적
인 접근성을 고려해 볼 때 21세기 중국 선교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선교 전략으로 제시될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중국에 불어오는 한류 열풍과 한국어의 수요의 확산을 보면서 현재 중국 대학교에 개설된 한국 어과만 보더라도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국내에 있는 한국어 교육기관을 통한 한국어 교수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어 교수로서의 준비과정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한국어 교육과정과 그리 고 교수가 되고 교수로서의 장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어 교수로서의 전문인 선교는 현재 중국을 복음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선교전략이며, 중국
의 기독교 지도자를 세우는데 가장 적합한 전략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어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세계선교를 위해 한국인들에게 주신 특 별한 은혜이다. 우리는 이 시대적인 부르심 앞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주님의 지상 최고의 위임명령(마 28:19-20)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초기 한국 선교의 동반자 선교 / 김광성 교수(주안대학원대학교 선교학과)
2023년 1월 17일 KWMA 제33차 정기총회 발표자료
- 1. 들어가는 말
현지 교회와의 협력(Collaboration in Mission) 트랙은 이른바 동반자 선교 트랙이다. 동반자 선 교는 서구방식의 선교는 외부자가 주도하는 일방적인 방식이며, 이러한 선교 방식에 익숙한 한국 선 교(사)는 내부자 중심의 선교 시대를 맞이하여 이를 극복해야 한다1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 러나 오늘날 세계 기독교는 더 이상 서구 크리스텐덤 시대의 기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2 선교 주도권을 기준으로 선교의 주체를 외부자와 내부자로 나누는 것은 선교를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 한국 선교(사)가 외부자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선교방식에 익숙하다는 평가 역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경균의 지적처럼 한국 교회의 해외선교는 국내 목회와 긴 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자기 주도성이 강한 사역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성은3 다른 한 편에서 보면 한 국형 선교방식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 기독교의 변화에 주 목해야 한다.
본 발제는 초기 한국 교회의 해외선교 역사에 동반자 선교 사례를 궁구하여 한국교회 선교 DNA 속에 세계현대 선교 위기상황 극복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동반자 선교 실천이 흐르고 있 음을 입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초기 타문화권 선교의 시작점을 장로 교 총회 설립 이듬해인 1913년에 총회 결의에 따라 중국 산동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으로 본 다. 이는 시기적으로 동반자 선교 개념이 구체적으로 선교계에 등장하기 전이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 의 동반자 선교 개념을 규명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국 선교의 뿌리가 동반자 선교에 있다는 사실 을 입증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먼저 동반자 선교의 선교학적 개념을 규명하고, 다음으로 한국 교회 선교의 시대구분 을 통해 한국 교회 초기 선교 현황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 초기 선교 실천 과정에 동반자 선
1 한철호, “NCOWE2023 세계 기독교 시대와 한국선교의 평가와 전망(트랙리더모임”, 미간행자료, 7-8.
2 “오늘날의 기독교가 “서구 크리스텐덤(Christendom) 시대에서 탈식민지(post-colonial), 탈근대(post-moenrn), 탈서구(post-Western, post- Christendom) 시대를 거쳐 세계 기독교(World Christianity/Global Christianity) 시대로 전환”되면서 “세계 교회의 선교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 철호, 위의 자료, 1.
3 한경균, 「동반자 선교 보고서」, 서로북스, 2022, 22.
교 DNA가 내재되어 있음을 규명한다. 비록 한국 교회 초기 선교 역사 규명 작업을 장로교 총회 설
립과 동시에 이루어진 타문화권 선교사 파송과 연관된 사료와 문헌자료를 위주로 진행하는데 이는 발제자가 확보한 연구 자료의 한계로 인한 것임을 밝힌다.
- II. 동반자 선교의 선교학적 의미
선교의 주체를 외부자와 내부자로 나눈다고 할 때 동반자 선교는 외부자와 내부자가 함께하는 선 교라고 할 수 있다. NCOWE 2023 트랙리더 모임은 “세계 기독교 시대와 한국 선교의 평가와 전망”이 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크리스텐덤 시대의 선교가 외부인 중심이었다면, 코로나 시대 이후 세계기독교 시대의 선교는 내부인(Indigenous)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제 자립, 자치, 자전을 넘어서서 내부인들 이 중심이 되어(Centering local), 그들에 의한 자신학화가 이루지고 자신의 문화 공동체 안에서 그리 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과정과 이를 외부자가 돕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다”4고 밝힘으로 써 코로나 이후 시기의 선교는 내부자(인)이 중심이 되고 외부자(인)가 돕는 동반자 선교가 되어야 한 다고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선교학에서 말하는 동반자 선교의 개념과 그 형성 과정을 살펴보자. 동반자 선교의 선교 학적 개념을 연구한 선교학자로 김영동, 안교성, 변창욱, 김은수 등이 있으며,5선교실천 현장의 이야기 를 제공한 한경균, 황홍렬, 이종실 6등의 진술도 동반자 선교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 동반자 선교와 에큐메니칼 협력 선교의 신학적 의미
동반자 선교라는 개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동반자 선교 개념은 에큐메니칼 선교에서 나온다. 에큐메니칼 협력선교라는 개념이 선교학의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7김영동의 분석에 따르면 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 서구 교회와 선교사의 열정, 낙관주의, 실용주의는 기독교의 확산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많은 부작용과 선교의 위기를 초래했다. 특히 기독교 국가가 주도적으로 일으킨 1,2차 세계대전은 진화론과 계몽주의에 물든 선교 낙관론을 선교 위기론으로 바꾸었다.8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종식되면서 식민주의와 연계되어 있다는 의혹으로부터
4 한철호, “NCOWE2023 세계 기독교 시대와 한국 선교의 평가와 전망(트랙리더모임)”, 미간행내부자료,1.
5 변창욱, “WCC 부산총회 종합평가와 선교적 의의”, 「선교와 신학」 제34집, 2014, 113-146, 김영동, “동반자 선교의 신학 정립과 실천적 방향 연구”, 「선 교신학」 제53집, 2019, 56-83, 안교성, “한국 교회와 에큐메니컬 선교 대두 이전의 원에큐메니컬 선교: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 사」 제57호, 2022, 197-226. 김은수, 「현대 선교의 흐름과 주제」, 대한기독교서회, 2001; 2010, 「해외선교 정책과 현황」, 생명나무, 2011. 참조
6 황홍렬 편저, 「에큐메니칼 혐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부산장신대학교 세계선교 연구소/꿈꾸는 터, 2015. 한경균 지음, 「동반자 선교 보고서: 세계 교회의 품경있는 일원되기」, 서로북스, 2022. 참고
7 황홍렬 편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부산장신대학교 세계선교연구소/꿈꾸는 터, 2015. 11.
8 김영동, “한국 교회 산동 선교의 의의: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2012년 산동선교100주년기념학술대회 발표논문, 1.
자유로울 수 없었던 서구 교회의 전통적인 선교는 새로운 변화를 통한 돌파구 마련이 불가피했 다.1 식민지 확산과 함께 전통적 선교는 기독교왕국(Christendom) 확장을 추구하던 서구 교회가 곤 혹스러운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세계 기독교계의 상황이 급변하였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였다. 수 백 년 동안 식민지로 전락했던 나라와 민족들이 민족문화와 정체성 회복을 시작하면서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배척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였다. 현지 교회는 식민지배자였던 서구 국가에 대한 자국민 의 부정적 정서를 외면할 수 없었기에 서구 교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일부 서구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은 제3세계 교회를 세계교회의 일원으로 유지하기 위해 협의체를 만들었 다. 1948년 네덜란드 아스테르담에서 창설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는 화해와 일치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표적인 기구가 되었다.2 이와 함께 탈식민주의적 상 황에서 선교를 지속하기 위해서 서구교회는 새로운 형태의 선교를 구상해야 했다. 서구 선교기관이 아닌 현지 교회가 선교의 주체로 등장하는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이 등장하였다.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에 대한 안교성의 연구가 있다.3그가 말하는 에큐메니칼 선교는 교회가 선 교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점이 핵심이다. 에큐메니칼 선교 개념이 확산되면서 현지 교회가 중심이 되 는 선교, 선교사와 현지 교회가 동역관계인 선교,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모든 지역이 선교지가 되는 선교, 복음 전도와 세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선교 사역으로 삼는 선교로 발전하면서 1952년 빌링겐 (Willingen) 국제서교협의회 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으로 귀결된다.4 이에 대한
“한국 교회가 에큐메니칼 협력선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선교사가, 선교공동체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선교신학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황홍렬의 통찰5은 설득력이 있다.
- 로잔운동과 동반자선교
에큐메니칼 선교신학 뿐 아니라 로잔 3차 대회의 선언서인 <케이프타운 서약>에서도 하나님 의 선교를 강조하고 있다.6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개최된 제3차 로잔대회(The 표ird Lausann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은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신학이 전도의 우선 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관점을 확장하여 사회적 책임을 그리스도인의 임무로 선교의 영역에 포함시키 는 총체적 선교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7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로잔언약에서 사회참여
1 David J. Bosch, Transforming Mission (NY, Orbis Books, 1991), 334-339.
2 이광순, “WEA, WCC, LAUSANNE: 세계 선교의 방향과 비전”, 2012년 9월 6일 영락교회 장로회 특강 녹취록, 13.
3 안교성, 한국 교회와 에큐메니컬 선교 대두 이전의 원에큐메니컬 선교 –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7호, 2022, 198.
4 김영동, 앞의 글, 2.
5 황홍렬 편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20.
6 황홍렬 편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20.
7 “로잔언약은 과거 복음주의가 개인구원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교회의 사회 정치적 참여 사회정치참여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획기
를 선교의 영역으로 인정한 이후 로잔운동은 신학적 연구와 토론의 결과물을 통해 복음주의 선교신 학의 총체성을 부단히 확보해 가고 있다.8 특히 로잔진영은 공식적 선언문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9 케 이프타운서약에 이르러 총체적 선교(Integral Mission)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여 선교 실천 의 영역으로 사회참여를 확보하였다. 특히 케이프타운서약은 서약문 II부는 “우리가 섬기는 세상을 위하여: 케이프타운 행동 요청”이라는 부제를 달고 대회 중에 다루어졌던 6개 영역의 주제를 반영하 고 있다. 그 가운데 IIF는 선교의 하나 됨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동역하기라는 주제를 다루면 서 제2항에 세계선교에서의 동반자 협력을 “종족집단이나 국가나 대륙도 자신들의 지상명령을 완성 하는 배타적 특권을 지녔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로 강조한다. 지역, 신학, 조직, 소속 집단, 빈부 등 의 차이를 넘어서 “선교에서 남과 북, 동과 서의 참된 상호관계, 서로 주고받는 상호 의존, 존중과 존 엄성을 추구하자”고 동반자 협력을 역설한다.
III. 초기 한국 선교 시기 동반자 선교
한국교회선교역사 연구자들은 한국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의 시작을 1913년 조선장로교회총회 설립과 함께 시작한 산동선교로 본다.10그러나 동반자 선교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1945년 이후에 세계 선교계에 등장한 개념이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초기 한국 교회가 타문화권으로 선교사 를 파송할 때에는 현대 선교학에서 말하는 동반자 선교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시기적 으로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국 선교 시기 동반자 선교 사례를 고찰하는 이유는 채 수일의 말처럼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는 산동선교부터 해방 후 태국으로 파송한 최찬영, 김순일 선 교사는 에큐메니칼 협력선교의 모범사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11 물론 이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적인 선언이었다.” 박보경, “로잔운동에 나타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관계”, 37. 안희열, “로잔운동이 세계선교에 끼친 공헌과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
향”, 「선교와 신학」 제27집2011), 109-141.
8 로잔언약 제5항, 하이레이대회 선언문(Evangelical Committment to Simple Lifestyle), 그랜드 래피즈 대회 선언문(전도와 사회적 책임 선언문, “전도 와 사회참여: 복음주의적 헌신”) 제4장, 마닐라선언(Manila Manifesto) 21개 항의 고백 가운데 제8항, I. 온전한 복음(Whole Gospel) 부분의 제4장, II. 온 교회(Whole Churdh) 부분의 제7항 그리고 케이프타운서약(표e Cape Town Commitment)의 I부 제7항과 제10항, II부 IIA, IIB, IIC, IIE, IIF에서 복 음주의 진영의 선교신학이 사회참여 또는 사회적 책임을 중요한 사명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9 CC 머리말에 “이 서약은 로잔언약과 마닐라 선언에 기초하며, 그 역사적 연속선상에 있다”고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10 김한성은 조선장로교회 선교의 시작을 동일문화권 선교와 타문화권 선교로 구분한다. 1907년 이기풍 제주도 파송, 1909년 블라디보스톡 최관흘 파 송, 1909년 한석진 일본 파송을 동일문화권 선교에 해당하며, 1912년 조선장로교회 설립을 기점으로 결의하여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를 중국 산동지 역으로 파송한 것을 타문화권 선교의 시작으로 본다. 김한성, “한국 교회 타문화권 선교 역사의 시기 구분에 관한 연구”, 「성경과 신학」 제60집, 2011, 110- 111. 변창욱은 초기 한국 교회 해외 선교 역사를 1902년 인천 내리감리교회가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로 파송한 1902년을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는 이민 교인 대상으로 지교회 개척 사역이었으므로 동일문화권 사역으로 보며, 1907년 이기풍을 제주도로 파송한 것은 유사문화권 선교로 분류하고 1913 년 중국 산동선교를 실질적인 타문화권 선교로 간주한다. 변창욱, 변창욱,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 파송 100년(2017-1956”, 「선교와 신학」 제19집, 2007, 14.
구성모는 교단별 초기 역사를 연구하면서 역시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인 홍승하를 포함한 초기 선교가 주로 해외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동일 문화권 사역으로 구분하고 조선장로교회가 1913년에 선교사를 파송한 산동선교를 한국 교회 타문화권 선교의 효시라고 하였다. 구성모, “초기 한국교회 의 선교사 파송에 관한 연구”, 「선교와 신학」 제45집, 2014, 281-290.
11 황홍렬 편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11. 채수일은 본서의 추천사에서 “에큐메니칼 협력선교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현대적 개념의 에큐메니칼 협력선교를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조동진은 2012 마닐라 포럼 기조 강연에서 1912년 중국 산동선교의 역사적 배경과 사도적 선교
의 DNA를 언급하면서 “중국 교회는 표면상으로는 한국이 자기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한 데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입장이었을 뿐 중국 교회 지도자들의 속내 즉 그 심정과 감정은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1그의 지적은 산동선교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국교회가 선교 현장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김영동은
중국인이 입장에서 볼 때 한국 선교사들의 사역이 일본의 중국 침략행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가 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는 해석을 더 한다.2 이는 한국교회가 중국 산동에서 실천한 선교에 대해 새 로운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 것이다.3
조선장로교회는 서구 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은 지 한 세대가 지나지 않은 1913년에 중국 산동성 에 서교사를 파송하면서 타문화권 선교를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일제강점기에 해당한다. 세계 기독 교 선교 역사에서 피식민지 상태의 교회가 세계선교에 참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예수교 장로회는 1912년 총회를 조직할 때 해외 타문화권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4김영동의 연 구에 따르면 조선장로교회는 선교지 선정부터 선교사를 파송하는 과정까지 조선장로교회가 일방적 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선교지 교회와 충분히 협의하였다.5 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블레어 (William N. Blair)는 조선장로교회가 총회 설립 이전에도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자는 안을 여러 번 제기하였고 마침내 총회가 설립되면서 총회가 중국 내 선교지를 조사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 한국 교회 선교역사를 연구한 자료를 통해 조선장로교회 총회가 중국 산동선교를 결의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과정을 통해 한국교회 선교역사 속에 동반자 선교에 대한 어떤 인식이 있었는지 살펴보자.7
산동선교를 위해 조선장로교회는 재중, 재한 미국북장로교회 선교부와 협의하였다.8 1913년 헌 트 선교사가 산동 지방을 방문하여 조선장로교회가 선교사 파송하는 것을 협의하고 그 결과를 총회 에 보고하였으며,9이와는 별개로 총회는 선교 허가를 얻기 위해서 1913년 5월에 재령의 박태로 목사 와 평남 안주의 김찬성 목사가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에 참석하여 조선장로교회의 중국 선교
1 조동진, “초기 한국교회 선교운동과 사도적 DNA(Apostolic DNA and Missionary Movement of Early Korean Church)”, 2012년 마닐라포럼 기조 강연 원고 참고.
2 김영동, “한국교회 산동선교의 의의: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산동선교 100주년의 교훈과 제언」,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편, 서울: 도서출 판 케노시스, 2012. 166.
3 김광성, “산동선교 시기 방지일 선교사의 선교사역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과 종교정책 고찰”, 「복음과 선교」 제60집, 2022. 52.
4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 회록』 (1912), 21. “(1907년) 로회(노회)를 시작할 때에 졔주(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에 깃븜(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 전도를 시작하되 지나(支那·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 원하오며…”
5 김영동, “한국 교회 산동 선교의 의의: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 2012년 산동선교100주년기념학술대회 발표논문, 4.
6 William N. Blair, “Mission Work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표e Korea Mission Field 11 (July 1915): 190.
7 조선장로교회의 산동선교 결의와 진행 과정에 대한 다양한 연구결과보고가 있지만 본고에서는 김영동, 변창욱의 연구를 참고한다.
8 변창욱,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 파송 100년(1907~1956),” 『선교와 신학』 제19집, 2007, 25.
9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제2회 회록」, 1913, 58-59.
의향 대한 의향을 전달하여 허락을 받았다. 박태로와 김찬성은 아와서 그 해 9월 총회 시기에 ‘산동
성 회양현과 내양현(萊陽 라이양) 등지’를 선교지로 정했다고 보고하였다.10
조선장로교회는 중국 산동선교를 결의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과정에서 조선장로교회 총회를 중심으로 중국주재 미국장로교회선교회, 중화예수교장로회와 다각적인 협의 과정을 거쳤다. 당시에 는 비록 동반자 선교 또는 에큐메니칼 협력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를 파송하 는 교회와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교회가 서로 협의하여 선교와 선교지를 결정했다는 점에서 한국 교 회의 초기 선교 역사에는 동반자 선교의 DNA가 잠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 가 주목할 점은 조선장로교회 총회가 선교사를 파송할 때 현지교회의 허락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선 교사들을 현지의 교회로 이명하도록 결의여 현지 노회에 소속시켰다.11 1916년 총회는 선교사들은 반드시 선교지 교회로 이명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만약 귀국하면 총회의 회원됨을 결의하였 다.12 이로써 선교사들이 현지 교회와 교단의 보호를 잘 받을 수 있었고, 현지 노회의 노회원으로서 당당하게 사역하며 협력 선교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 선교사가 설립한 모든 교회와 노회는 반드시 중국교회 아래 소속되었다. 이는 현지 교회(교단)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선교사역을 진행하는 에큐 메니칼 협력선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 IV. 나가는 말
한국 교회가 중국 산동선교를 계획할 때부터 선교지 교회와 긴밀하게 협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장로교회는 신생교회였다. 공식적인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한 1885 년 이후 20여년이 지난 1907년 한국인 목사가 탄생했고, 1912년에는 총회를 설립했다. 타국으로 선 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행정능력이나 재정능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세계기독교계가 인정하는 지위 도 없었다. 1910년 에딘버러선교사대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 15인 가운데 한국 사람은 윤치호가 유일 했으며 대부분의 한국 교회 대표는 선교사들이었다.13 당시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대표하였다는 말 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선교 당시 한국 교회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는 대조되는 연약함을 발견할 수 있다.
피선교지 국가의 신생교회로서 한국 교회가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을 실현하고 자 할 때 연약함은 겸손이 된다. 겸손해야 협력할 수 있다. 자발적 겸손이거나 부득이한 겸손이거나
10 『예수교장로회 조선총회 제2회 회록』, 1913, 58-59.
11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회 총회 회록』(1913), 29. 『총회창립90주년 기념 대한예수교장로교회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323.
12 『조선예수교장로회 제5회 총회 회록』(1916), 45-46.
13 한국 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아담스(James E. Acams), 에비슨(O. R. Avison), 버크몰(H. O. T. Burkmall), 푸트(W. R. Foote), 포사이더(W. H. Forsythe), 게일(James S. Gale), 질레트(P. L. Gillett), 해리스(M. C. Harris), 존스(George eber Jones), 녹스(Robert Knox), 모펫(S. A. Moffett), 레 이드(W. T. Reid), 롭(Alex F. Robb), 언더우드(H. G. Underwood), 윤치호(T. J. Yun)이다. 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 World Missionary Conference 1910, Report of Commission I: Carrying the Gospel to all the Non-Christian World, New York: Fleming H. Revell Company, 1910, 374. 안희열,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 100년 평가”, 「신학논단」 제59집, 2010, 174. 각주 6) 재인용.
겸손하면 상대방을 인정하게 되고, 상대방을 인정하면 자기주도적인 선교가 아닌 상대방을 존중하
는 선교가 가능해 진다. 한국 교회는 언제부터 주도적인 선교를 하게 되었을까? 선교지의 교회와 협 의 없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선교사역을 수행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높아진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2010년 제5차 세계선교전략회의(NCOWE V)에서 당시 한국선교연구원 원장 문상철은 “동반 자 선교: 서구형에서 글로벌형으로”라는 주제로 Plenary Session을 진행했다.14 그는 동반자 선교의 개념을 “선교 주체들 간의 동반자 관계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동반자 선교는 “선교 주체들의
현상적인 실재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이러한 정의를 근거로 그는 한국 교회 선교 지도자 들 가운데 글로벌한 차원에서 동반자 선교를 실천한 6명의 인물을 소개하였는데 그 가운데 초기 한
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로 1956년에 파송된 최찬영 선교사를 포함하고 있다. 비록 그의 연구는 공 교회 간 협력으로서의 동반자 선교를 다루거나 산동선교 시기 선교사를 동반자 선교 실천가로 언급 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시한 동반자 선교실천을 위한 배우는 자세, 극복해야 할 개교회주의와 개 단체주의 성향은 초기 한국 선교시기에 이미 실천되었기에 초기 한국 선교 역사에는 동반자 선교 DNA가 잠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본 발제에서는 동반자 선교를 “선교기관(초교파 선교부와 초교파 선교회)이 아닌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 되고 주도권을 갖는 에큐메니칼 선교”라고 본 안교성의 견해에 따라 초기 한국교회 선교인 산 동선교는 동반자 선교를 실천한 사례라고 보았으며, 선교학자들과 선교실천가들이 공통적으로 동반
자 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하나님의 선교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국 교회가 동반자 선교라
는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초기 한국교회 선교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한국 선교(사)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는 선교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선교현장의 교회를 세계 기독교를 함께 구성하는 동반자로 인정하는 세계 교회로의 교회론적 전환이 필요하다.
토론과제
- 초기 한국 선교 역사에서 발견한 동반자 선교 사례를 현대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동반자 선교 개념을 적용하여 설명해 보자.
14 ≪선교신문≫ 온라인판 2010년 8월 16일자 기사 내용 참조
출처: https://www.missionews.co.kr/news/27434 2023년 5월 30일 접속.
15 “동반자 관계(partnership)란 넓은 의미로 과업을 위해 상호 은사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William D. Taylor ed., Kingdom partnerships for synergy in missions,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1994. 245-246. 문상철의 발제물에서 재인용.
- 2. 동반자 선교의 신학적 근거인 하나님의 선교와 실천적 사례인 에큐메니칼 협력선교의 연관성
을 복음주의적 선교 입장에서 논의해보자.
- 한국장로교회가 최초로 타문화 선교를 결의하고 수행할 때 한국에 있는 서구교회 선교회, 중 국 교회와 사전에 협의하게 된 이유는 한국 교회의 성숙한 태도였을까 아니면 한국 교회에가 서구 교회의 영향 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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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 PCK와 인도네시아 교단과의 동반자적 협력 사역 / 김동찬 선교사(PCK 전 인도네시아, 현 본부)
■ 자기소개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D.
전 PCK 인도네시아선교사 (32년)
현 PCK 해외다문화선교처 본부선교사
■ 목차
들어가는 말
- 당위로서의 동반자적 협력 선교
- 2. 인도네시아교회 요청에 의한 PCK선교의 시작
- 본격적인 동반자적 협력 선교와 선교의 형태
1) 교단 신학교를 통한 협력
2) 교회 개척과 목회
3) 목회자 계속 교육과 교회 지도력 개발
4) 한국의 인도네시아 근로자를 위한 GIA단의 선교사 파송
- 4. PCK선교의 다변화와 다양화를 가져올 동반자적 협력 선교 나가는 말
키워드: 협력선교, 동반자선교, 교회의 선교, 단체간 선교 양해각서, 외국교회가 한국에 선교사 파송
들어가는 말
370여 년 전에 인도네시아에 서구 식민통치 세력이 들어오면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왔다. 인도네 시아에 첫 한국 선교사가 들어올 때는 오랜 역사의 기존 현지 교단들이 많이 있었다. 전국적인 교단 도 있지만, 지역 중심, 종족 중심의 교단들도 있어서 지역에 따라 현지 교단들과 협력해야 효과적으 로 선교할 수 있었다. 그래서 PCK는 선교 출발선부터 현지 교단과의 동반자적 협력을 기반으로 선교 를 시작하였고, 현재 PCK는 현지 교단과의 협력을 통한 동반자 선교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 당위로서의 동반자적 협력 선교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이다. 비록 언어, 국가, 지역, 종족과 문 화가 다른 토양에서 자랐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들어간 지 역에 기존의 교회가 있다면, 당연히 선교사는 현지교회와 동반자적 협력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아시아 국가 중에서 가장 늦게 개신교 선교가 이뤄진 나라이다. 한국교회가 해외 에 복음을 전할 때 아시아는 물론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 기존의 지역 교회들이 있는 상황이었다. 교회 선교를 하는 PCK는 선교지의 기존 교단들과 협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계 기독교 (World Christianity)라는 관점에서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지역교회의 역사와 독특성을 인정하 면서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늘 현존하는 지역 교회와 유대하고 협력하면 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지상 교회의 성장과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해 어느 교단이든 서로 알고 협력하고 지체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70,80년대의 PCK인도네시아 선교는 기존 인도네시아 교회들과 서로 알고 지내며 그들과 소 통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 2. 인도네시아교회 요청에 의한 PCK선교의 시작
PCK의 인도네시아 선교는 한국과 한국교회가 아직 경제적, 국제적 지위가 미약한 가운데서 시 작되었다. 70,8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과 선교 운동의 성장은 아시아교회들과의 교류와 연대를 낳았 고, 한국교회와 국제 선교 지도자들이 만나고 교류함으로 시작되었다. PCK의 인도네시아 선교는 인 도네시아 교단 GPIB(Gereja Protestan Indonesia Bagian Barat, 서부인도네시아개신교회)의 요청 으로 시작되었다. 박창환목사는 GPIB의 요청으로 1971년 9월에 수마트라 방카(Banka)섬으로 파 송되었다. 박선교사는 이미 세워져 있던 GPIB 숭아이리앗(Sungai Liat)의 ‘오라 엣 라보라(Ora et Labora: 라틴어로 ’기도와 노동‘이란 뜻이다.)’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교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교회는 네덜란드의 영향 아래서 세워진 교회이다.1 1년 후 김윤석목사가 파송을 받아 박선 교사의 뒤를 이어 이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이처럼 PCK의 첫 인도네시아 선교는 교단 간의 국제적
1 박창환.현수삼, “나의 인도네시아 선교 회고”, 『예장(통합) 인도네시아선교 35주년 기념집』 (인도네시아선교사회, 2007) 21-25.
유대 관계를 통한 동반자적 협력선교 선교였다. 제2호 선교사인 김목사는 현지 교회 안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교육선교를 확장하였다.2
제 3호로 파송받은 서정운목사는 PCK와 인도네시아교회협의회(PGI: Persekutuan Gereja- gereja Indonesia)와 협력하였다. 서선교사는 인도네시아교회협의회의 문서선교 산하단체인 ‘베뻬까 구눙물리아(BPK Gunung Mulia)’ 소속으로 전국에 있는 교회, 신학교, 성경학교 등과 협력하여 문 명퇴치 사업을 통해 전도하였다.3 그는 인도네시아교회협의회가 만들어 놓은 네트워크를 타고 그들의 프로그램을 진행함으로 선교하였다. 이처럼 PCK 첫 세대 선교는 현지 교단 혹은 단체들과 협력함으 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현지 교단으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은 PCK는 계속 선교사를 파송했고, 현 지의 네트워크를 타고 선교를 확장하여 갔다.
- 본격적인 동반자적 협력 선교와 선교의 형태
다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PCK도 1990년부터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PCK는 GIA(Gereja Isa Almasih, 예수그리스도교회)교단과 협력하게 된다.4 1987년 파송 받은 신 방현, 서성민 두 선교사는 1988부터 GIA와 관계를 맺다가 1991년 PCK와 GIA 사이에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하였다. 두 교단은 지금까지 33년 동안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협력하고 있 다. PCK가 공식적으로 파송하여 GIA와 함께 일한 선교사는 모두 11가정이고 현재는 4가정이 동역 하고 있다.5
PCK가 GIA와 협력하는 선교의 내용과 협력 형태는 다음과 같다.
1) 교단 신학교를 통한 협력
인도네시아는 이슬람이 강한 국가라서 선교사들이 비자를 받기가 쉽지 않다. 인도네시아 선교 초기부터 ‘비자의 해결이 선교 사역의 절반’이라는 말이 있다. 교단과 교단이 협력을 통해 선교사 비 자를 받을 때 선교사가 안정적으로 선교할 수 있다. 또한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교단은 대부분 교단 운영 신학교를 갖고 있다. GIA도 중부 자바에 교단 직영 압디엘(Abdiel) 신학대학을 갖고 있다. 첫 두 선교사(신방현, 서성민)는 이 신학교의 교수직을 유지하면서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안정적으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에 입국한 9가정도 주로 신학교를 통하여 비자를 받았다.6 신학교에서 가
2 김윤석.이재희, “인도네시아 방카섬 교육선교” 위책, 26-35.
3 서정운.김경숙,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위책, 36-37.
4 Gereja Isa Almasih(GIA, 표e Church of Jesus Christ) 교회는 1946년에 창립되었고, 교리와 예전은 오순절 계통이고, 교단의 조직과 행정은 장로 교회 형태이다. 2023년 현재 조직교회는 170여 개, 미조직교회를 포함하면 500여 교회, 교인 수는 10만여 명이 된다. 교단 본부는 현재 중부자바 스마랑 (Semarang)에 있다.
5 1991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PCK와 GIA 사이에 공식적으로 협력한 선교사는 모두 11가정(신방현, 서성민, 이필환, 임종혁, 배종혜, 서광종, 윤재남, 김동찬, 이현희, 김광호, 김성훈)이다. 현재 GIA와 함께 사역 중인 선교사는 4 가정(신방현, 윤재남, 김광호, 김성훈)이다.
6 2023년 현재는 PCK선교사는 인도네시아교회협의회(PGI) 회원교회의 추천으로 PGI 이름으로 목회자 선교사 비자를 받는 경우가 더 많다.
르치는 사역은 교단의 지도자를 가까운 시일 안에 배출한다는 점에서 현장교회에 빠르게 영향을 미 치고 교회성장을 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교회음악을 전공한 PCK선교사들은 압디엘신학대학 안에 교회음악과를 설립하는 산파의 역할
을 하였다. 그 후에 매년 교회음악을 전공한 한 두 명의 견습선교사가 30여년 동안 파송되어 기악과 성악 실습 위주로 가르쳤다.7 PCK의 견습선교사 제도는 교단의 많은 선교사 후보생들을 발굴했고 정규선교사로 파송받기 전에 선교지에 대한 이해와 선교사역을 준비하는 데 좋은 기능을 하였다.8 이것은 교단 대 교단의 동반자 협력 관계에서 오는 결실일 것이다.
2) 교회 개척과 목회
GIA교단과 협력하는 선교사들은 신학교 졸업생들과 팀을 이뤄 깔리만탄섬에서 교회가 없는 곳을 조사하고 교회개척 계획을 수립하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이 사역은 현지 교단의 전폭적인 지지와 목회자들의 협력 속에서 잘 이뤄져서 칼리만탄에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었다.
필자는 바탐섬에서 2001년부터 GIA교단과 협력하여 GIA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였다. a. 안정적인 선교사의 신분 보장
PCK선교사는 GIA를 통하여 비자를 받으면 자동으로 GIA목회자 멤버십을 갖는다. 현지 교 단의 교리, 직제, 예전, 예배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여 교회를 개척하기 때문에 선교사가 교회를 개 척할 때 새로운 교회 제도와 예배를 구상하고 예배 형태를 정착시키는 번거로움이 없다. 필자 또한 GIA 교회를 개척할 때 기존의 GIA교회의 모범을 그대로 따라갔다. 이 교단의 목회자와 강단을 교 류하고, 부활절, 성탄절 연합예배를 갖고, 지역 교회 연합회 행사를 함께 진행하였다. 현지 교단이 마 련해 놓은 전도와 목회 활동 레일 위를 그대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 선교사가 갖고 있는 특별한 전도 도구들을 통한 선교
필자는 영어, 팝송, 태권도, 키보드, 기타, 드럼, 컴퓨터 교육을 통해 아동과 청소년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PCK 파송의 견습선교사들(1년 사역)이 여러 재능으로 가르쳤다. 교인 가정이나, 마을 공 터에서 혹은 ‘가정 주일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을 전도하였다. 청소년들은 탁구, 축구, 농구를 함께 하 면서 전도하였다. 청소년들이 몇몇 모인 이후에는 ‘일일 카페’를 통해 친구들을 교회로 초청하였다. 기독교 청소년의 자아 확립, 성, 마약, 데이트, 결혼, 인생의 설계 등의 주제로 청소년 대상 세미나들 을 열었다. 한국에서 오는 단기 선교팀들이 성경학교를 개최하고, 몰에서 ‘한국 문화의 밤’이라는 제 목으로 문화 공연을 하고, 중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 공터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인니어를 잘하지 못하는 중국계 자녀들을 위해 현지인 사역자들이 무료 개인 과외도 실시하였다. 청년들은 한국 문화
7 교회음악을 전공한 신학대학원생이 대부분이나 때로는 교회음악과 학부생도 와서 봉사하였다.
8 필자도 1994년부터 매년 한 사람 혹은 한 가정의 견습선교사를 받아 같이 생활하였다. 그들은 필자의 사역을 보조하고 나름 선교지 경험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거쳐간 40여명의 견습선교사 중 1/4 정도가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에 관심이 많아 한국어 교육을 통해 전도하였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지닌 특별한 전도 도구들을 통
해 선교하였다.
- 교회 재정의 빠른 자립
초기에는 선교사가 교회의 모든 운영비를 선교비로 지원했다. 교인들이 취업하기 시작하면서 십일 조 헌금 운동을 통해, 현지교회가 선교관 운영에 사용되는 모든 공공 요금은 부담하고 있다. 선교사는 사례비를 받지 않고 현지인 사역자들만 사례비를 받고 있다. 선교사가 개척하는 GIA교회는 개척 시 작 때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처럼 선교비를 받는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 이 교회 개척을 수월하게 하고 현지교회의 재정 원칙을 따라가면서 교회가 빠르게 자립하였다.
3) 목회자 계속 교육과 교회 지도력 개발
PCK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GIA교회들을 방문하여 목회자 세미나, 교회 영성 집회와 신학교 강의를 하였다. 이런 교류가 서로 간에 좋은 목회적, 선교적 자극을 하였다. 지금까지 GIA교단과 압 디엘신학대학 추천으로 PCK산하의 교단 신학교에서 7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공부하고 자국에 돌아와 교단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4) 한국의 인도네시아 근로자를 위한 GIA교단의 선교사 파송
2019년 GIA교단이 수리아완(Suriawan)목사를 김해에 거주하는 3천여 명의 인도네시아 근로자 를 섬기기 위해 파송하였다. 2024년 초에 무슬림 사역을 위해 한 가정을 더 파송할 예정이다. PCK는 선교사를 보내는 사역만 한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교회로부터 선교사를 받는 사역도 하고 있다. 글 로벌시대에 세계 인구의 3%가 자국을 떠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상황에서 교단 간의 동반자적 협력은 ‘모든 세계교회’가 ‘모든 세계교회’로의 선교를 촉진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많은 근로자를 필요로 하 고 있어, 세계 곳곳의 미전도 종족 사람들이 한국에 근로자로 오고 있다. 국제적 교단 간의 협력은 우 리 집 대문 앞에 와 있는 미전도 종족 영혼들을 구원하는 귀한 사역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 PCK선교의 다변화와 다양화를 가져올 동반자적 협력 선교
PCK는 현재 30개국 48개 교회와 교단 대 교단의 공식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교단 간의 인 적 물적 교류를 통하여 글로벌시대에 걸맞는 선교를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현장에 있는 선 교사를 통하여 협력관계를 넓혀갈 때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구체적인 협력선교를 이뤄나갈 수 있 다. 인도네시아 GMIM(Gereja Maseji Injili di Minahasa, 미나하사복음그리스도교회)과는 2004 년,9 HKBP(Huria Kristen Batak Protestan, 바탁개신교회)와는 2017년에 각각 공식 협력관계를 맺
9 GMIM교회는 1934년 설립되었고, 술라웨시의 미나하사 종족 교회로서 1,000여 교회, 교인 수는 83만명 정도이다. 두 교단 사이에는 2004년에 양해각 서가 체결되어 몇 년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비거주 선교사들을 통하여 약간의 협력 사역을 진행하다가 현재는 소강상태다. 체결된 양해각서(MOU)
었다.10 현지 선교사들을 통해 인적 물적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리고 노회 대 노회의 협
력관계, 현지선교회 대 현지교단의 협력관계 등 다양한 형태의 협력관계를 갖고 있다. 동반자적 협력 관계가 더 넓어지고 깊어져서 복음전파가 전세계에 확장되는 일이 일어나리라 믿는다.
나가는 말
PCK는 인도네시아 선교 초기부터 교회 간의 동반자적 협력을 통해 선교하였다. 첫 세 명의 PCK선교사는 인도네시아 교회의 요청으로 파송되었고, 첫 두 사람은 초청 교단의 기존 교회를 목 회함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1991년부터 PCK는 GIA와 32년 동안 협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PCK 11가정이 GIA와 함께 사역하였고, 현재는 4가정이 GIA의 현지교회 목회자, 신학교 교수, 목회자 훈 련 사역 등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GIA 역시 PCK와 협력하여 한국의 인도네시아 디아스포라를 위 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앞으로 이러한 동반자적 선교가 발전하여 ‘온 교회가 온 세상에 온전한 복 음을 전하라’11는 사명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토론을 위한 질문:
– 동반자적 협력 선교의 관점에서 나의 선교와 나의 단체의 선교는 어느 정도 동반자적 선교를 수 행하고 있는가?
– 동반자적 협력선교가 앞으로 한국교회에 어떤 선교적 토양과 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서로 간 행사와 기도 제목 정보를 나눈다.
2) 서로 간의 방문과 회의 개최: 두 교회의 대표들이 교환 방문하여 각 교회의 생활과 사역들을 서로 알고 지낸다. 교회 간 관계 증진과 신학적 이해를 도모한다.
3) 선교를 위해 인적 자원을 교환하고 서로 지원한다.
10 HKBP교회는 1861년 설립되었고 수마트라의 바탁 종족 교회로서 3,627개 교회, 교인 수는 500만 명 정도이다. 2017년 두 교회 사이의 협력이 시작되 었고, PCK 이규대선교사 가정이 HKBP 후원으로 비자를 받아 수마트라에서 협력사역을 하고 있다. 이규대선교사의 안내로 HKBP는 두 명의 인도네시아 신학생을 연세대학교에 보내어 신학박사 과정에 공부하게 하였다. 2017년에 체결된 HKBP교단과의 양해각서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전도: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공동의 사역이다. 생명공동체의 건립을 위해 교인들에게동기 부여하고 교회의 리더들을 함께 세워나간다.
2) 신학훈련: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준비시키고 상황에 맞는 신학교육과 지도력을 함께 개발한다.
3) 교육사역: 교육선교, 지도력 개발, 청년.여성 교육, 제자훈련을 통해 복음을 함께 전한다.
4) 지속 가능한 개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빈곤을 감소키고, 성평등, 경제 정의 실천, 지속 가능한 농업 등을 위해 양 교회가 함께 개발 사업에 참여한다.
5) 교류사업: 교회 지도자, 평신도 지도자, 여성, 청년, 신학자와 신학생들의 교류를 통하여 선교 역량을 함께 향상한다.
6) 종교와 문화에 대한 연구: 국가 간 종교와 교류가 급증하고 있다. 그래서 다문화와 다종교 대한 이해의 증진이 필요하다.
7) 평화와 정의를 위한 기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한다.
11 1989년 로잔 마닐라 선언문이 말한 ‘표e Whole Church to take 표e Whole Gospel to 표e Whole World’ 슬로건임.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실천적 적용 / 노태민 목사 (PCK 본부)
■ 자기소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해외·다문화선교처
담당업무: 해외교회들과의 교류
■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동반자 선교를 하지 않는 선교에 대한 현지인들의 비판
Ⅲ.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강점
Ⅵ.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시 고려사항
Ⅴ. 나가는 말
키워드: 현지교단, 협력선교, 동반자 선교, 현지인 중심, 내부인 중심
Ⅰ. 들어가는 말
Ⅱ. 동반자 선교를 하지 않는 선교에 대한 현지인들의 비판 Ⅲ.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강점
Ⅵ.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시 고려사항 Ⅴ. 나가는 말
키워드: 현지교단, 협력선교, 동반자 선교, 현지인 중심, 내부인 중심
- 1. 들어가는 말
KWMA 제8차 NCOWE 제1차 Pre-Consultation(2023.4.3.)에서 프로그램위원장 한철호선 교사가 NCOWE 2023 개요와 방향에 대해 설명하였다.
“세계화와 산업화의 폐해가 불러온 코로나 시대가 가져다 준 가장 큰 깨달음은 지역성의 중요성 이다….외부인 중심에서 내부인 중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제 자립, 자치, 자전을 넘어서서 내부인 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에 의한 자신학화가 이루어지고 자신의 문화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르 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과정과 이를 외부자가 협력하는 과정으로 전환되고 있다.”
금번 NCOWE 핵심 주제는 ‘내부인 중심 선교’이다. 이는 현지인과 협력 선교하는 동반자 선교 를 뜻하며 ‘현지인 중심 동반자 선교’ 트랙에서 주요하게 다루게 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오랫동안
복음주의선교와 에큐메니칼선교를 주요한 선교정책으로 다루며 전세계 44개 교단과 6개 세계에큐
메니칼기구들과 협력하고 있다. 특히, 제103회 총회(2018.9.13.) 때 개정된 ‘총회선교신학’에서 ‘선교 와 동반자적 협력’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파송 교회와 현지 교회와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 속에서 인적, 물적, 지적인 자원과 함께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겸손한 자세로 선교사역에 참여한다. 동반자적 협력의 바탕은 상호 신뢰이며 이를 통 하여 동반자적 협력은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동반자적 협력 안에서 서로 도울 수 있는 은 사를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을 통해 배우고 도움을 받고 자신의 부족을 채울 필요가 있다. 동반자적 협력은 자신이 선호하는 교회, 슬로건, 프로그램, 시스템, 방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동반자 선교 신학과 정책을 선교현장에서 적용한 선교사들의 사례를 예장(통합)총회 해외·다문 화선교처 홍경환 총무가 발제하였다. 아래 내용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사례를 정리한 부산장신대
학교 황홍렬 교수가 집필한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을 주요로 참고하였고, 현지 교단 관계자와 현지교단 중심 동반자 선교를 실천하고 있는 선교사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였
다. 무의미한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특정 교단과 선교사를 명기하지 않았다. 먼저, 현지 교단과 동반 자 선교협력하지 않는 선교사들에 대해 현지인들이 비판하는 내용을 정리하였다. 비판을 겸허히 수 용하여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를 할 때 기대할 수 있는 여러 강점들을 정리하였고, 실제로 동반자 선교를 실천할 때 고려해야 될 사항들을 정리하였다.
Ⅱ. 동반자 선교를 하지 않는 선교에 대한 현지인들의 비판
- 자본주의적 선교
선교사가 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물품을 성도들에게 지원하거나, 신학생들에게 학자금과 사례 비를 지원하고, 센터 및 교회를 건축하여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다보니 현지인 교회에서 선교사 교회 로, 혹은 선교사 교회에서 다른 선교사 교회로 평신도들과 신학생들이 수평이동하는 자본주의적 선 교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선교방식은 현지교단과 충돌을 일으키며, 선교재산 이양시 교회와 목회자 간 다툼의 원인이 되며, 교회 자립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 무한경쟁 선교
한국의 개교회 중심 무한 경쟁하는 모델이 해외선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선교사들간에 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현지교회와도 무한경쟁이 이루어지다보니 오히려 한국선교사들이 현지선교에 큰 방해가 된다는 소식을 듣는다고 아프리카에 파송된 선교사가 말한다. 선교사들이 현지 교회와 협력하지 않고, 다른나라 출신 선교사와 한국 선교사들간에도 협력이 이루이지지 않아 같은 사역에
중복지출이 이루어지고, 선교의 순수성을 현지인으로부터 의심받는다.
- 제왕적 선교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무조건 자기방식대로 선교하는 것이 침략이 아닌가?” 현지교회 지도자의 말이다. 몇몇 선교사들이 현지인 목회자들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협력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선교한다. 또한, 사업 위주로 선교하며 현지인과 협력을 하더라도 그들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다.
선교의 최종적 목표가 현지이양인데 과연 이양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받고 선교재산을 사유화하거나 세습하여 현지교회와 지속적으로 충돌한다.
Ⅲ.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강점
- 현지교단의 법적 보호와 현지인 동역자의 배려를 받는다.
여러 선교지에서 비자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자를 위해 불필요한 행정절차 진행을 위한 시간 소요가 많으며, 선교비가 과다하게 지출된다. 하지만 현지교단이 협력하여 비자를 지원해준다 면 안전하게 선교사역에 전념할 수 있다. 또한, 현지인 동역자로 인해 선교사가 현지 문화에 빨리 적 응할 수 있고,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교통사고, 인종 차별 등으로 인한 위기 상황시 적절한 지원을 받 을 수 있다.
- 저비용 고효율 선교가 가능하다.
선교사 생활비는 한국교회에서 지원하고 사역에 필요한 비용은 현지교단에서 분담할 수 있으며 현지자원을 동원하여 선교사 혼자 재정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다. 현지교단으로부터 사역 요청을 받으 면 미리 한국에서 준비하고 현지에 입국 후 바로 사역에 참여할 수 있고, 사역에 대한 중복투자나 사역 지 중첩으로 인한 갈등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한 명의 선교사 생활비면 2~3명의 현지목회자를 세울 수 있기 때문에, 현지문화와 언어가 자연스러운 현지목회자들이 직접선교를 하고, 선교사는 지역의 선 교전략을 연구하며 다양한 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선교전략가로 활동할 수 있다.
- 현지교단과의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현지교단과 신뢰관계를 구축할 경우 다양한 이점이 있다. 선교사 부재시에도 사역이 연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향후 선교사역과 재산 이양시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재산 이 이양되었을 경우 오히려 현지교회의 분쟁 원인이 되거나 잘 조성된 선교사역을 망칠 수 있다. 여기 서 중요한 것은 선교지 언어와 사회문화에만 적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지교단의 목회적, 행정적 문화에도 적응해야 한다. 한국의 사역 스타일을 현지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현지교단의 사역 문화를 이해하고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진행시킬 때 진정한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 현지에 필요한 사역을 할 수 있고, 선교사역이 현지교단에 의해 이어질 수 있다.
현지교단의 요청에 의해 사역을 진행하면 현지에 꼭 필요한 사역을 할 수 있다. 이미 현지 목회 자가 하고 있는 사역을 근처에서 중복 사역할 필요가 없으며, 선교사가 생활하기 좋은 지역에 선교사 들이 몰리는 지역적 중첩도 피할 수 있다. 즉흥적이거나 개인적인 사역이 아니라 현지교단과 협력하 여 진행한 사역은 공동으로 책임지는 구조가 되기에 선교사가 없어도 사역이 지속된다.
- 선교재산의 사유화 및 세습화를 방지하고, 현지 이양시 분열을 최소화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건축된 교회나 센터를 현지교단 명의로 등록하면 선교재산의 사유화 및 세습을 방지할 수 있다. 이는 재정 문제로 인한 오해와 유혹으로부터 선교사를 보호한다. 전설적인 선교사에 의해 순간 부흥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 현지인들에게 이양해야 할 때 많은 문제가 생긴다. 현지교단을 배제하고 특정 교회에 이양하거나, 새롭게 교단을 만들어 이양할 시 현지교단간, 현지교 회간 분열을 일으킬 수 있고 남겨진 선교재산은 오히려 분열을 확대시킨다. 특히, 현지교단이 운영하 는 신학교가 있는 상태에서 한국 선교사가 운용하는 별도의 신학교를 세우면 졸업 후 목회지가 없거 나 교회를 개척할 처지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검증된 신학생을 받기도 어렵다. 또한, 선교사가 은퇴하면 신학교를 운영할 재정을 감당할 없어 곤란해진다.
- 현지교단의 협력관계를 활용하여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할 수 있다.
현지교단의 협력관계를 통해 선교사가 가지 못하는 나라에 선교가 가능했다. 예를 들면, 라오스 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선교사 입국과 활동을 경계했다. 태국과 라오스는 이웃국가로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태국기독교회를 통해 라오스에서 선교사가 합법적인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구축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현지선교의 문을 열수 있었다.
- 현지교단과의 협력은 국내 다문화 사역까지 연장될 수 있다.
국내에 다양한 나라 출신 이주민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현지 목회자가 국내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면 효과적인 다문화 선교가 가능하다. 해외 한인교회를 떠올리면 이해가 가능하다. 외롭고 고단한 한국 생활에 교회 공동체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선교 가 어려운 국가출신 이주민들에게 효과적으로 선교할 수 있다. 필리핀그리스도연합교회 출신 존스 갈랑 목사를 본 교단에서 초청하여 종교비자를 발급해주고, 현지교단에서 사역자의 생활비를 부담 하고, 오산이주노동자센터와 필리핀공동체를 위한 협력 선교활동을 지원하였다.
Ⅳ.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시 고려사항
-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만일 현지교회 없이 독자적으로 진행했으면 필요하지 않았을 절차와 협의 과정에 선교사와 후원 교회가 지치기 쉽다. 하지만 현지문화와 현지인들의 목회적, 행정적 처리 문화도 배워야 한다. 처음에 는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점차 빨라질 것이고, 사역이 현지에서 지속적으로 이어 질 수 있기에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 가치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지 사정을 모르는 한국교회에 서 바라는 선교, 빠른 성과를 맺는 선교가 아니기에 후원교회의 선교인식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
- 현지 교단의 통제로 사역이 제한될 수 있다.
현지의 요청에 의해 사역이 정해지면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후원교회나 선교사가 그 사역 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막상 현장에 참여한 선교사가 그 사역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적인 사역을 하고 싶은 경우가 생긴다. 이때 현지교단과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 동반자 선교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다.
현지교단과 선교사가 자주 만나 지속적으로 협력하며 동반자 선교에 대해 이해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단순히 재정지원으로 주는 자, 받는 자로 역할이 인식되면 동반자 선교가 불가능해지며, 선교사들의 선교를 단순히 건물 짓는 프로젝트로 인식하고, 당장 사용가능한 선교재정이 없으면 선 교사들과의 협력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선교사 파송교단의 리더십이 변경될 때마다 현 지교단과의 관계를 복원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교단의 규모 차이로 인한 양측의 리더십 욕 구를 충족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
- 동반자 선교가 단순한 인적교류로 그치거나 귀족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현지 문화와 사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에 양교단의 지도자들의 현지 방문이 필요하다. 현 지 방문을 통해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관계를 형성해야 되지만, 좋은 식사와 관광으로 끝나는 단순 방문에 그칠 수 있다. 또한, 현지교단의 최고 지도자들과 관계하다보면 풀뿌리 교인들과 지역교 회 목회자들과 소통이 줄어들어 귀족적 동반자 선교에 그칠 우려가 있다.
- 개인선교사의 역량에 좌우될 수 있다.
현지에서 직접선교를 현지목회자가 하고 선교전략가로서 현지목회자들을 신학적, 목회적, 행정 적, 재정적 지원을 선교사가 해야 될 때, 선교사의 신학적 역량, 현지언어 역량, 자원동원 역량, 네트워 킹 역량에 따라 동반자 선교가 좌우될 수 있다.
- 전문적이고 안정된 선교지원이 필요하다.
세계 현지교단들의 필요를 파악하여 각 선교지별 전략적 선교사 양성이 필요하고, 교단 지도자
들 간의 충분한 협의와 감독에 의한 조직적인 협력이 필요하기에 한국 본부에서 전문적인 행정 지원 이 필요하다. 또한, 동반자 선교는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기에 안정된 재정지원이 필요하다.
Ⅴ. 나가는 말
“현지교회는 흥하고 한국교회와 선교사의 흔적이나 영향력은 쇠하여야 하리라” 케냐의 이원재 선교사의 고백이다. 선교사의 최종 목표는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여 현지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하고 마지막으로 선교사역과 재산을 이양하고 나오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선교사가 보기에 안타깝고 불 안한 것도 있겠지만 현지마다 가지고 있는 목회방식과 행정방식이 다르다. 현지문화를 배워야하듯, 현지교단의 방식을 배우고 협력해야 한다. 한국방식을 고수하고 이식하고자하면 오히려 현지의 반발 이 생긴다. 한국교회가 평생 현지교회를 후원하지 못하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선교이다. 선교 사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동안 선교사와 현지교단과 다양한 정치, 경제, 문화 등을 활용하여 하나님께서 선교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실 선교를 신뢰하며 선교동역자로 서 현지교단 중심 동반자 선교가 전세계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토론과제
- 현지교단이 있는데 동반자 선교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 2.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를 하기 위해 신뢰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참고문헌
황홍렬,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꿈꾸는터, 부산장신대학교 세계선교연구소, 2015.
이명석, “삼자간 에큐메니칼 선교협력 연구-영등포노회 한국·독일·가나 교회 협력선교를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에큐메니칼위원회, 『세계선교와 에큐메니칼 연대 선교협력자료집』,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8.
세계기독교미래연구원, 『세계 기독교의 미래와 에큐메니즘』, 한국장로교출판사, 2015.
한경균, 『동반자 선교 보고서』, 서로북스, 2022.
에큐메니칼위원회, 『21세기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 대한기독교서회, 2008.
Kenneth R. Ross, Jooseop Keum, Kyriaki Avtzi, Roderick R. Hewitt, 한국에큐메니컬학회 역, 『에큐메니컬선교학 / 변화하는 지형과 새로운 선교개념』, 대한기독교서회, 2018.
에큐메니칼위원회, 『복음과 에큐메니칼 신앙: 대한예수교장로회(PCK)의 뿌리와 정체성』, 한국장로교출판사, 2021
현지인 교회와 교단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어 진행 중인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 주민호 선교사
– 침례교 선교사들의 중앙아시아 사역 교훈
FMB (침례교해외선교회), 전) 카자흐스탄, 현) 본부
■ 목차
들어가는 말
I. 중앙아시아 침례교회들과 총회의 현재 사역 상황
II. 동반자 선교가 가능한 현지 교회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선교사역의 특징들
III.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가 가능한 교회들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내적 요인들
IV. 중앙아시아 침례교회 사역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에 주는 교훈
나가는 말
Key Word: 중앙아시아, 현지인 교회, 하나됨, 연합, 동반자 선교, 협력 선교, 자발적 낮아짐, 선교사의 역할이해
들어가는 말
중앙아시아에서의 침례교 선교사역은 소련 연방의 문이 열린 1991년에 4가정의 선교사가 입국 하면서 시작되었다. 세 가정은 고려인 사역을 위해 일하기로 한 러시아 침례교단과의 협약에 근거하 여 그들이 제공하는 비자를 받고 입국하였고, 1가정은 카자흐 사역을 위해 별도의 비자로 입국하였 다. 사역이 진행되면서 드러난 몇 가지 현안들로 인해 러시아 침례교단과의 협력보다는 별도 사역이 도움이 되겠다는 판단과 함께 독자적 사역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시간이 많이 지난 후 러시아 침례 교단과는 각각 현지교단 차원에서 교제하는 관계가 되었다.
현지인 성도나 교회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던 침례교해외선교회의 중앙아시아 선교사역은 2022년 5월 시점에서 지역교회 113개,1안수받은 현지인 목사 33명, 전임 사역자 120명, 신학교 졸업 생 256명, 전체 성도 5,000여명으로 구성된 교단으로 발전하였으며, 교단으로서의 중앙아시아 침례 교 총회는 2003년에 구성되었고, 이 구조 안에서 중앙아시아 침례신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1 카자흐스탄 73교회, 키르키즈스탄 27교회, 외즈베키스탄 8교회, 기타 국 5교회로 총 112교회로, 이 자료는 2023년 5월22일에 중앙아시아 총회 상임총
무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이다.
본 발제는 현지인 성도나 교회, 교단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외부자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어
2 현지인 교회들과 교단을 형성하고, 현재 그들의 주도하에 진행되고 있는 중앙아시아 침례교회들의 선교사역을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관점에서 평가해 보고, 현지인 교회와 교단이 없을 경우에 어 떻게 사역을 시작하고 발전시켜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진행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몇 가지 교 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I. 중앙아시아 침례교회들과 총회의 현재 사역 상황
중앙아시아 총회 소속 113개 교회 중에 선교사들에 의해 직접 개척된 교회가 25개이고,처음부 터 현지인 1세대, 2세대, 3세대들에 의해 개척된 교회는 87개이다. 개척 선교사에게서 현지인으로 담 임목사 리더십이 완전히 이양된 교회가 16개이며, 그 교회들 중에서 알마티중앙교회, 살렘교회, 라 드닉교회, 임마누엘교회가3 침례교회들을 연합시키는 중심교회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이 없던 지역에 선교사가 들어가서 현지인 성도와 교회가 생겼고, 그 지역교회들이 자체적으로 자민 족 전도와 구제, 그리고 해외선교까지 담당하는 일들이 자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출석 성도 1,200 명이 되는 알마티 중앙교회의 경우 코로나 상황과 함께 했던 2022년에도 159명이 예수를 영접하고, 103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14개 목장(가정교회)이 분가하였다. 287명의 성도가 29개 지역으로 여름 단기봉사 선교사역에 참가하였으며, 정부와 함께 힘든 이웃 음식 봉사 등을 통해 소금과 빛의 역할 을 감당하고 있다.4
중앙아시아 총회 운영 및 연합 사역은 현지인 리더십 4명과 선교사 2명으로 구성된 총회임원회 에서 이끌고 있다.5 중앙아시아 총회 연합 사역으로 청년 연합 수양회, 청소년 연합 수양회, 교회학교 교사 수양회가 매년 1회 진행 중이고, 중앙아시아 침례신학교 주관으로 전임목회자 세미나가 년 2 회, 사모 수양회가 2년에 1회 진행 중이다. 이 모든 사역은 현지인들이 중심에 서서 각종 프로그램과 재정을 책임지고 준비하여 진행하고 있으며, 임원 선교사들은 주로 강사 소개 부분에서 역할을 하며 준비를 돕는 동반자 선교사역으로 진행되고 있다. 가정교회 목회자 세미나, 가정교회 평신도 세미나, 가정교회 목회자 컨퍼런스, 가정교회 목자-목녀 컨퍼런스가 소속 선교사의 리더십 하에 총회 교회들 과 선교사들의 참여 가운데 초교파 사역으로 진행 중이다. 이 사역들도 국제가정교회 사역원 측과 함께 선교사들이 강의 자료와 매뉴얼 번역, 강의 자체를 담당하였던 사역인데, 이제는 현지인들이 강 의, 진행 등 대부분을 감당하고 있으며, 선교사들은 컨퍼런스 강사 연결과 일부 강의 및 강의 통역 정 도를 감당하고 있어서, 이 또한 현지인 중심의 사역이 되었다.
2 침례교해외선교회의 카자흐스탄과 키르키즈스탄 선교사역은 1991년부터, 우즈베키스탄 사역은 2000년도부터 시작되었다.
3 선교사로부터 현지인에게 담임목사 사역 위임이 알마티중앙교회는 2000년, 라드닉교회는 2006년, 살렘교회는 2008년, 임마누엘교회는 2013년에 실 행되었다.
4 Almaty Central Church 2022년 년 사역 보고 https://www.youtube.com/watch?v=BVluIGf Yr9I 2023년 6월1일 검색
5 총회의 현지인 임원은 총회장 1인, 부총회장 2인, 상임총무 1인이며, 선교사 임원은 총회 전도부장과 신학교 학장으로 구성 중이다.
알마티중앙교회와 지교회들, 살렘교회와 지교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단기봉사 선교사역은
매년 전체 교인의 20-40%가량이 참여하여 주변 각 도시와 나라들을 대상으로 2013년부터 실시 중 이다. 단기봉사 선교사역은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우즈벡스탄의 도시들은 물론 침례교 선교사 들이 사역하는 북인도, 터어키, 아제르바이쟌,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모잡비크, 러시아, 한국, 피지에 서 진행되었다. 이 사역은 한 선교사가 ‘선교의 삶’ 과목을 개발하여 준비과정을 도왔고, 상기 언급 지 역 선교사들과 연결하여 선교 사역지를 정하고 단기팀이 가서 섬기게 하면서 시작된 사역들이다. 총 회 소속의 다른 교회들도 이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함께 팀을 구성하여 움직이고 있다. 코로 나 펜데믹 상황을 지나면서 러시아 남단의 오순절 교단 교회들과 목회자들, 우즈베키스탄 교회들과 목회자들, 이스라엘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도 현지인 사역자들의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사 역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앙아시아 침례교 총회 소속 현지인 목회자 2 가정은 침례교해외선교회 선교사 훈련과정을 거 쳐 선교사로 허입되어 NK사역과 국내 중앙아시아 외국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침례교 사역은 처음에는 외부자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현지에 개 척된 교회와 교단이 자민족 자국 복음화와 주변 민족 선교사역을 내부자 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진행 하고 있다. 현시점에는 대부분의 사역을 현지인 지도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선교사들은 동반자 내지 는 동참자로 참여하며 돕고 있다.
- II. 동반자 선교가 가능한 현지 교회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선교사역의 특징들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한 문서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지만,6소수의 논문과 책 자 그리고 소논문에 보여진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들의 사역 특징은 아래와 같다.7
- 민족별, 언어별, 지역별로 진행된 선교사들의 팀사역. 중앙아시아 초창기 침례교 선교사역은 팀사역으로 진행되었다. 시작부터 지역별로 나누어서 사역하고 사역 대상 민족을 분명히 결정하여 사역하였다.8선교사들은 사역 대상 민족의 마음의 언어로 사역을 하였으며,9해당 민족별로 회심자 그룹이 형성되면서 교회개척이 시작되었다. 교회개척은 고려인으로 시작하여 다민족교회로 발전한 교회들과 더불어 카자흐 교회들, 위그르 교회들, 키르키즈 교회들, 우즈벡 교회들, 둥간교회처럼 특 수 민족 중심 교회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 개인, 소그룹, 큰 그룹의 균형이 있는 사역.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역은 모두 개척 사역이
6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한 석사논문 1개, 박사논문 7개, 회고록 1권이 있다.
7 주민호, 「선교적 교회론 관점에서 본 카자흐스탄 침례교회」, (선교학 박사 논문, 말레이시아 침례신학원, 2018), 31-8.
8 김동성, “카자흐스탄에서의 교회개척과 제자훈련의 성과, 재평가와 열린 가능성”, 전방개척선교저널, 2014년 7-8월호, 66-7.; 유병기,『침례교 선교의 발 자취: 1988-205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의 시작과 선교 역사』,(서울:침례교해외선교회, 2014), 87,258,261.; 정여호수아,“카자흐스탄 무슬림 둔간족 내에서의 선교적인 돌파”, 『제3차 FMB 알마티 전략회의』, 주민호 편, (서울: 기독교 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2014), 478.
9 김동성, “중앙아시아 선교사역의 문을 연 FMB 사역의 정신과 그 결실”, 『침례교 선교의 발자취』, 454; 주바나바,“중앙아시아에서의 팀 사역 정신에 대 한 소고”,『침례교 선교의 발자취』,(서울:침례교해외선교회, 2014), 477-8.
었다. 고려인, 카자흐, 위그르, 둔간, 키르키즈 모두가 다 최초의 신자들이었고, 최초의 교회들이었다.
한 명의 새 신자가 둘이 되고, 하나의 그룹이 두 개가 되며 점차적으로 큰 그룹으로 모이는 연합 교회 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한 교회들은 카자흐, 키르키즈, 우즈벡, 위그르 등 중앙아시아 민족들로 이루어졌는데, 각 민족의 문화에도 아주 적합한 교회였다. 반면 교회 개척 예배 모임 후에 사람들이 점점 모이면서 회중이 형성되자 교회 안의 소그룹을 통해서 성장한 교회들은 고려인 중심의 교회들 과 러시아인 중심의 교회였다.10
- 하나 됨과 한 몸을 이루는 연합 사역.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던 초기 과정에는 각각의 민족이 가지고 있던 오해와 아픔을 풀고 장벽을 넘기 위해서 각 민족의 모국어를 사용하고 문화에 맞게 접근하였다. 복음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감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서 민족의 벽을 넘어서 함께 모이는 연합 모임을 만들도록 안내하였고, 예수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도록 도왔
다.11
하나 됨과 한 몸을 경험하는 연합 사역으로 먼저 청년연합 수련회를 하였다. 그다음에는 점차적 으로 전 교인 연합 수련회, 청소년 연합 수련회, 교회학교 교사 수련회, 전임목회자 세미나, 가정교회 목회자 세미나, 가정교회 평신도 세미나, 가정교회 목회자 컨퍼런스, 가정교회 목자 목녀 컨퍼런스 등 으로 발전되어 왔다.
무엇보다 이 연합 사역의 꽃은 신학교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3개국에서 열매와 소명 이 검증된 현지인들이 중앙아시아 침례신학교에서 함께 훈련받는다. 소속 공동체에서 검증된 사람들 이 신학교에 들어와서 다른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온 신학생들과 함께 훈련받고, 함께 목회자 연장교 육과 연합 사역을 하면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12
- 십일조와 넘치게 드리는 삶. 침례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현지 성도들에게 헌금 생활을 가르 쳐서 십일조는 물론 넘치게 드리는 헌금 생활을 실천하게 했다.13점차 현지 교회들도 각 교회의 십일 조를 총회 협동 사역비로 보내주어 소위 총회비는 국내 선교, 해외선교, 다음 세대 사역 및 목회자 복 지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14
- 선교지 교회의 보내는 사역. 선교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초창기부터 복음 사역을 위해 타지 역, 타문화, 타국으로 단기봉사 선교팀과 장단기 사역자를 보내도록 훈련하여,15코로나 집단감염 시 기를 지난 현재에는 오히려 더 활성적으로 타문화권 사역을 하고 있다.
10 주민호 “카자흐스탄에서의 교회개척 사역”,『제1차 침례교 선교 지도자 포럼』,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편, (서울: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2006),113; 주바나바,“바람직한 교회개척 모델 – 카자흐스탄 침례교회를 중심으로”, KMQ 56호, 67.
11 유병기, 앞의 책, 253; 주바나바, 앞의 글, 70.
12 김현종, 「땅끝으로 가는 길에 핀 꽃: 중앙아시아 선교사역을 위한 신학교 사역의 중요성과 연합을 위한 역할」, (목회학 박사논문, 서남침례신학대학원,
2020).
13 주바나바, “선교지 카자흐스탄에 세워진 선교하는 교회, 선교적 교회”,『2017년 한인 남침례교 선교대회 자료집: 건강한 교회 성장』, 55.
14 김동성. “중앙아시아 선교사역”, 455
15 김동성, “카자흐스탄에서의 교회개척”, 70; 유병기, 앞의 책, 167, 267.
III.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가 가능한 교회들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내적 요인들
중앙아시아 침례교회의 일부인 카자흐스탄 침례교회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 던 한 연구에 의하면 카자흐스탄 교회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현지인 리더십들의 삶과 사역에는 ‘하나 님의 선교’, ‘인격적 신뢰 관계’, 하나 됨과 연합의 공동체’, ‘공유된 사역 전략’이라는 공통요소가 발견된 다고 보고된 바 있다.16 또한, 현지인 리더들은 선교사들의 삶을 통해서 사역자 간의 관계와 교회 사역 에서 팀 사역의 모델을 보고 배웠다고 보고되었다.17무엇이 보여졌고, 무엇이 공유된 것이었을까?
첫째, 사역의 중심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는 정신이다. 선교사들이 30년이 넘 는 기간 동안 매년 2회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를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기도했던 삶은 현지인 목 회자들 세미나에서도 동일하게 이어졌다. 각 교회 별 목장모임에서 맛보는 이런 관계와 정신은 중앙 아시아 모슬렘 배경을 가진 성도들에게 움마 공동체를 대체할 기독교 공동체를 인식하게 해 주었다. 둘째,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 관계’임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침례교해외선 교회 초대 회장 유병기는 기술하기를 “주바나바/손쏘냐 선교사 가정과 팀 사역자들은 살렘교회의 지도력을 세우고 위임하는 과정에서 선교사의 역할(4P)에 대한 단계, 즉 전방 개척자(Pioneer), 부모 (Parent), 동반자(Partner) 그리고 동참자(Participant)로서의 역할을 잘 인지하고 선교의 큰 그림을 그리며 사람을 세웠다”고 하였다.18 이들은 준비도 안 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라는 압력에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으며 관계 속에서 먼저 본을 보여주고, 현지인들이 할 수 있도록 준비
해 주면서, 조금씩 위임하다가 완전히 위임하는 단계로 진행되었다.
세째, 선교사와 현지인 리더십 사이에 ‘세우고 세움 받는 리더십’이라는 흐름이 있었다. 카자흐스 탄 침례교 선교사들의 사역을 연구한 한 외부인은,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 나는 리더십과 교회 사역을 현지인들에게 빨리 넘겨주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선교사는 현지인 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였다.19 이런 지적에 대해 한 현장사역자는 반박하기를 “한 사 람이 영적으로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던가?”라고 반문하였다. 서양 선교사들의 경우 현지인들이 복음 사역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현장을 떠난 후, 주로 방문자, 손님, 때로는 교사의 입장에서 뒤에서 그림자처럼 사역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보았다.20
신속한 리더십 이양이 목표가 아니라 확인된 리더십을 세우는 것이 목표였기에 점검되고 건강한 리 더들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16 주민호, 「선교적 교회론 관점」, 287-98.
17 주민호, 「선교적 교회론 관점」, 38-43.
18 유병기, 앞의 책, 282.
19 Weonjin Choi, An Appraisal of Korean Baptist Missions in Kazakstan, Central Asia, (Ph.D diss. 표e Southern Baptist 표eological Seminary, 2008), 144-149, 171.
20 주바나바, “바람직한 교회개척 모델”, 68-70.
- I 중앙아시아 침례교회 사역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에 주는 교훈
현지에 성도나 교회, 그리고 교단이 없을 때 시작한 중앙아시아 침례교회 사역을 리서치하면서 발견된 사역 철학 즉,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라는 관점을 미래 선교사역을 위한 교훈으로 몇 가 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많은 지역과 민족, 언어권에서 보냄 받은 선교사나, 선교적 그리스도인의 선 존재가 여전히 중요함을 강조해야 한다. 선교사들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가 중요한 것을 인식하더라도, 많은 지역이나 나라에 선교사들이 동반자로서 함께 선교할 건강한 기독교 공동체나 교회, 교단이 없는 경 우가 많다. 이런 정황에서는 선교사들이 밖으로부터 보냄받아 들어가서 전도하고, 양육하여 현지인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세워나가는 사역이 절대적으로 먼저 필요하다.21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들 의 사례는 이런 상황에서 좋은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파송 전 선교사 훈련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침례교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사 훈 련원(GMTC)이나 세계선교사훈련원(WMTC)에서 훈련을 이수해야만 장단기 선교사로 허입된 다, 중앙아시아 초창기 침례교 선교사들은 훈련 과정에 모두 4P 단계(Pioneer – Parent – Partner – Participant)라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현지교회와 선교사의 역할 변화에 대한 로드맵을 제공받고 선 교지로 들어갔다.22 사역 현장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주면서 이 4 단계를 함께 실행하였다.
망가진 세상으로 보냄 받아 삼위 하나님을 보여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 를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는 선교사들이기에 그들의 인격과 삶, 사역이 총체적으로 예수를 보여주어 야 한다. 더불어 사역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선교사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 질 수 있도록 선교사 훈련 과정에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셋째,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역할 변화에 대하여 선교사는 물론이고, 파송교회와 파송 선교부 가 이해하고 동의해야 하며, 현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공유되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 중앙아시아 에 파송된 침례교 선교사의 초기 사역들은 개척자 상태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다. 물론 사역 중간에 팀 멤버로 들어와 합류했던 선교사들의 경우 이미 선임 선교사들이 형성해 놓은 신뢰 관계 위에서 진행되는 사역에 동참하였기에, 자연스럽게 개척자 단계는 거치지 않고 부모, 동반자 내지는 참여자 의 역할을 감당하였다.23
이런 역할 변화에 대한 이해는 선교사들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필요하다. 선교사와 현지인 들의 역할 변화에 대해 필자는 수시로 제자들에게 설명하여 성숙도에 맞게 사역을 위임받으며 책 무를 감당하는 단계를 이해하도록 도왔었다. 각 선교지에서 파트너십 컨설테이션(Partnership
21 박기호, 『타문화교회개척』, (서울: 개혁주의 출판사, 2005), 53-4.; 박기호는 랄프 윈터의 제안과 결을 같이 하여 현지교회에 의한 E1 전도가 가능하려 면 어떤 문화권에서는 E3 전도가 반드시 먼저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2 Ralph D. Winter, “네 사람, 세 시대, 두 전환기: 현대선교”, 『퍼스펙티브 1: 성경적 역사적 관점』, 개정4판 한국어판, 정옥배, 변창욱, 김동화, 이현모 역, (서울: 예수전도단, 2022), pp.557-8.
23 박기호, 앞의 책, 152-4.
Consultation)을 진행하며 미전도 종족 복음화를 위한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강조던 선교단
체가 있었다. 교회, 선교단체, 현지인들이 협력을 통해 선교를 효과적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 이 단체 의 목적이었다.24 이들은 선교사역 초창기부터 현지인들을 앞에 내세우고 선교사들은 뒤에서 그림자 목회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한 선교전략과 어울리면서 현지인 초신자들을 파트너십 컨설테이션 회 장, 증경회장으로 세웠다.25그리고 아직 믿음 안에서 충분히 성숙하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현지인들 을 각종 현지 사역과 특히 미국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현지인 대표라는 이름으로 초청하곤 하였다. 이들은 한사람이 영적으로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본다. 현장 기반 전략 이 아닌 이런 수입된 이론의 병패가 결국 선교지 현지인 지도자들을 영적 아버지, 멘토가 되는 과정 과 방법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목사라는 칭호는 가지고 있지만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역 자를 양산하였다. 교회 성도들과 지도자 모두 영적 고아들이 되었고, 교회는 영적 고아원이 되고 말 았다는 것이 그들의 사역을 현장에서 목격한 한 선교사의 분석이다.26 이런 혼란의 와중에 우리 침례 교 현지인 제자들은 선교사와 현지인들의 역할 변화와 사역 위임에 대한 큰 그림을 가지고 사역에 임 하였기에 수많은 유혹으로 흔들어 대던 상황에 휘둘리지 않았던 것에 대해 그들 스스로가 감사하곤 하였다. 이들은 영적 성장 단계에 따른 사역 위임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항상 좋은 결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역을 위임받은 현지인 리더십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잘 이끌어 가고 있었는데, 선교사가 다시 현장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이미 위임했던 사역을 본인이 다시 취하려고 하였을 때 현지인과 선교사 간에 아픔이 발생했던 경우도 있었다. 코로나 상황 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발생한 이런 어려움도 현지인 리더십들과 선교사 리더십들은 함께 해결하려고 애썼다.
이런 역할 변화에 대한 이해와 동의는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파송한 선교부와 파송교회와도 공 유되어야 한다. 선교 현지에 건강한 교회들을 세운 후 사역을 위임할 때 직책을 포함해서 그동안의 사역 결과도 현지인에게 위임하게 된 것을 우리 선교회는 기뻐하며 축복해 주었다.
넷째,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는 선교사와 현지인들 사이에 인격적인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 을 때 태동 되고 발전된다.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들이 팀 사역과 연합을 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 가 바로 인격적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팀 사역, 연합 사역, 신학교 사역, 목회자 연장 교 육, 현지인 교회들의 계속되는 선교사역들이 모두 선교사와 현지인 성도, 지도자들 사이의 인격적 신 뢰 관계에 기초하여 일어난 것들이다. 서로를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소진되면 내던져 버리는 인간관 계에서 살아오던 현지인들이 복음을 듣는 과정에서 먼저 예수님의 성육신을 비슷하게나마 보여주는 선교사들을 만났다.27 복음을 받은 현지인들에게 선교사들을 신뢰하는 가교가 만들어졌다. 기회를
24 Steffen Tom & Douglas Lois McKinney,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 김만태 역, (서울: CLC, 2010), 221. 25 주바나바, “바람직한 교회개척 모델”, 69.
26 주바나바, 앞의 글, 69.
27 이것은 1991년에 시작된 중앙아시아 복음 사역의 시대적-환경적 영향도 있었지만 선교사들의 자발적 낮아짐과 연약함의 노출은 성육신을 보여주는
더 많이 가졌던 선배 선교사가 후배 선교사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더 큰 교회가 기도와 물질로 먼저
섬기는 일이 일상이 되었을 때 서로 간에 하나님의 가족을 경험하면서 인격적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 다. 이런 인격적인 신뢰 관계는 문화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리미널리티이다.
다섯째,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가 가능하려면 초기부터 선교사 각 사람의 드러나고 보여지
는 사역 자체나 열매에 매달려 비교하면서 연연하기보다는 하나됨과 연합이 확인되는 선교적 리더 십 코뮤니타스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험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28 중앙아시아 침례교 회에서 선교사들과 초창기 현지인들이 함께 감당했던 역할은 결과적으로 볼 때 장차 현지인 주도의 사역과 연합 사역의 핵심이 될 선교적 리더십 코뮤니타스 공동체를 먼저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이 팀 사역을 하고, 팀 리더 모임이 년 2 차례, 전체 선교사들 모임이 년 2회 계속되는 것, 그 리고 현지인 리더십 모임을 동일하게 만들어서 진행한 것은 핵심적 리더십 코뮤니타스를 형성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역 비전과 목표, 방향, 사역 방법이 공유되는 선교사들의 코뮤니타스 공 동체 경험에 이은 선교사와 현지인 리더십들의 코뮤니타스 공동체 경험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 교로 발전하게 되는 큰 동력을 만들어 내었다.
여섯째,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감당하는 건강한 선교지 교회는 성경적 재정관에 근거한 삶을 보여주고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 준비되었을 때 시작된다. 대부분 선교지 사역의 현지화와 동 반 선교가 안되는 이유가 재정의 불균형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삼조를 드리면 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던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본을 따라 현지인 성도들도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와 더불어 구제헌금, 선교헌금 등 수많은 희생적 드림을 사랑으로 감당하게 되었으며, 목회자들이 모인 총회에서는 각 교회들의 십일조 헌금의 십일조를 총회비로 내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29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재정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성경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 들과 교회로 인해 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사역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일곱째,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감당하는 건강한 선교지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교육과 훈 련에는 공식(formal) 교육, 비형식(nonformal) 교육과 비공식(informal) 교육이 적절히 균형있게 수행 되어야 한다. 현지인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공식적으로 하는 세미나, 컨퍼런스, 각종 교육 모임도 필 요하다. 그러나 비공식적이고 비형식적인 만남들과 나눔들을 통해 보고 배우는 것이 더 강력하다. 함 께 하면서 배우고, 서로를 통해 보고 배우는 구조가 함께 형성될 때 현지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사 역을 감당할 것이다.
나가는 말
충분한 리미널리티 경험으로 인식되었다.
28 Alan Roxburgh, 『길을 잃은 리더들』, 김재명 역, (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09), 202-29.
29 중앙아시아 침례교총회에서는 2008년부터 각 지역교회의 십일조의 십일조를 협동 사역을 위한 사역비로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있다. 총회 협동 사역비 는 국내 교회개척, 해외선교, 목회자 돌봄, 다음세대를 위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필자는 이 소고에서 교인이 한 명도 없던 상태에서 외부에서 들어간 선교사들의 사역으로 말미 암아 이제는 5,000명 성도가 존재하고, 현지인들이 중심이 되어 각 도시와 나라, 대륙을 향한 사역 을 선교사들과 함께, 때로는 단독으로 사역하고 있는 중앙아시아 침례교회에 대해 나누었다. 리서치
로부터 발견하여 제시한 몇 가지 제안들이 한국 선교사들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침례교 선교사들이 잘했다고 자랑하는 듯한 발제가 된 느낌이라 민망하지만, 믿는 현지인이 없
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현지인들이 사역의 주인이 되게 하였고, 현지인 중 심의 동반자 선교가 진행되고 있는 사례를 나누어 한국 선교에 조금이라도 유익이 되기를 바라는 마 음으로 그런 부끄러움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한 동료 선교 신학자는 중앙아시아 침례교 선교사역은 세계 선교 전략사에 남겨야 할 사례라고 평가해 주어 격려가 되었다. 지금은 중앙아시아 사역을 모델
삼아 침례교해외선교회 선교사들이 있는 선교지마다 “함께하는 선교”를 하자고 깃발을 새롭게 치켜 들고 있는 중이다.
토론 질문
- 초창기부터 선교사들이, 그리고 생겨난 현지인 리더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를 듣고 함께 기도하는 일들이 계속되면서 선교적 리더십 코뮤니타스가 형성된 것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위한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말하는 내용에 대해 자신들의 경험을 반영하여 토론하라.
- 2. 선교사들 및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인격적 신뢰관계 형성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했고, 인격적 신뢰관계를 키우는데는 선교사들의 자발적 낮아짐과 연약함의 노출, 현지인과 선교사들의 하나님의 가족 체험 등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보고에 동의하는가? 이 주제와 내용에 대해 토론하라.
- 선교지 사역의 현지화와 동반자 선교사 안되는 한 이유가 재정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발제자는 지적했는데, 현지 교회의 재정 건전성과 독립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토론하라.
- 4. 선교사와 현지인 교회/리더십의 역할 변화에 대한 4P 단계를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에게도 설명하고 그들을 강화시키는 과정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에 정말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인용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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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종. 「땅끝으로 가는 길에 핀 꽃: 중앙아시아 선교사역을 위한 신학교 사역의 중요성과 연합을 위한 역할」. 목회학 박사논문. 서남침례신학대학원. 2020.
박기호. 『타문화교회개척』. 서울: 개혁주의 출판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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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 중앙아시아 현지인 지도자 인터뷰 (영상)
한 알렉산드르(Aleksandr Han) 목사
(알마타중앙교회[고려인 중심 다민족 교회] 담임 중앙아시아 침례교 총회 총회장)
비보스놉 아이다르(Aidar Bibbosynob) 목사
(살렘교회[카자흐 교회] 담임 중앙아시아 침례교 총회 총무)
Q1. 중앙아시아 침례교회 교회개척 현황 (1991-2023)
| Kazakhstan | 73 |
| Krygyzstan | 27 |
| Uzbekistan | 8 |
| Other | 5 |
| Total | 113 |
Q2. 현재 중앙아시아 침례교 총회 차원에서 기도하며 추진하고 있는 사역들은?
한 알렉산드르 목사
중앙아시아 침례교단의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의 교회 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해서 복음의 서진을 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앞에는 통과해야 할 세 상에서 가장 어려운 지역 국가들(중동 무슬림 지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의 기도제목 은 저희를 통해서 복음이 중동을 통과하여 땅 끝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까지 전해지는 것입니다.
Q3. 카자흐 민족 특성에 대한 소개
비보스놉 아이다르 목사
카작인은 관계중심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무슬림 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주변의 다른 사람 들의 시선과 생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카작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하고 그 소속 된 공동체의 의견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서양사람들 처럼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에게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닙니다. 카작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는 것은 자신의 친척들에게는 하나님으로 인정되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 결심은 첫째로, 그를 모든 관계에서 소외되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가까운 친척 가족들 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족이 그를 소외시킨다는 것은 지지와 도움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 결국 그가 자신들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고,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돌아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 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카작인들은 그가 소속된 사회 속에서 압박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시골에서 살아가는 카작인들에게는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압박이 예수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지 않는 가족들에 게까지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에 가족들이 예수 믿는 가족 구성원 에게더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Q4. 중앙아시아 침례교 총회 소속 “카자흐인 교회” 및 “성도들의 현황 (1991-2023)
약 20여개 카자흐 교회
약 1200여명 카자흐 그리스도인
Q5. 교회가 없던 중앙아시아에 교회가 이렇게 생겨나고 사역이 성장하게 된 요인들
한 알렉산드르 목사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 선교사역이 열리고 복음이 들어온지 30여년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 선교사역에 좋은 결실이 맺혀진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우리 땅에 오신 초창기 선교사님들의 삶으로 인해서 입니다. 그분들의 삶에서 저는 한 번도 부끄러워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저희에게 정말 놀라운 본이 되었습니 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진실되고 정직한 모습으로 가득했었습니다.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
다. “사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성도들도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 따라서 선교사님들이 어떠했느 냐에 따라서 바로 그분들의 제자들도 선교사님들 처럼 하나님께 헌신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
님 앞에서 정직하게 섬기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일어났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선교사님들의 연합과 화평함 입니다. 물론 저는 그분들의 성격이 다양하고 때로 는 갈등도 있었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본 것은 서로 연합하여 함께 기도하고 서로 돕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셋째는 저희 선교사님들이 현지 목회자들을 동등한 동역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현 지 목회자들과 선교사님들과의 놀라운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과 형제와 같은
Q6. 살렘교회 및 살렘 지교회들 상황
비보스놉 아이다르 목사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정부는 우리에게 모임을 금지하였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한번도 주일 예 배 모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저희는 가정교회로 사역해왔기 때문에 집에서 목 장 모임으로 모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가장 심한 격리조치가 있었을 때에도 저희는 각 집에서 가정 교회 모임을 멈추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유투브를 통해서 주일 예배와 설교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기간동안 저희는 영적으로 살아있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저희는 카작
민족 교회이기 때문에 정부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카작 정부는 카작인들만 모이는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대면으로 모이기 시작지 일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주일 예 배에 참여하는 습관을 잃어 버리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전진함으로 이제는 3년 전 펜데믹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는 다른 교회에 다니시던 분들이 저희 교회로 오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 의 목적은 영혼들을 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새롭게 구원받은 사람들이 교회 성도 들의 숫자에 더 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사역으로 인해 리더들이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 님으로부터 새로워지고 다시금 충성된 종으로 사역해가는 것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각 사람들이 하 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여 더욱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최근 10년 안에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를 통해서 3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게 해주셨습니다. 그중 하나는 러시아 지역에 있습니다. 좋은 목회자를 준비시켜서 파송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저희 본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는다면 하나 님의 교회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합니다. 영혼 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저희는 다시 한 번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나 는 일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워지는 일에 더욱 애쓰고자 합니다.
Q7. 한국 침례교 선교사들의 역할
한 알렉산드르 목사
중앙아시아 선교 32주년이 되었는데, 지난 32년 동안 선교사님들의 시기에 따른 사역을 돌아보 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는 영적 아비의 역할이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저희의 영적 아비로서 저희를 양육해주셨 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30여년간 사역해 오신 선교사님들을 저희는 너무나 존경합니다. 이분들은 30대 초반에 저희 땅에 오셔서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이 땅에서 저희를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하시고 지금까지 30여년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들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 사를 드립니다.
두번째는 멘토의 시기입니다. 지금 저희 주변을 돌아보면 많은 교회에 선교사님들이 사역을 현지 인들에게 위임하였습니다. 몇몇 교회들은 아직도 선교사님들이 직접 사역을 하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경우 현지인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좋은 멘토로서 선교사님들이 사역하지 않았다면 현지 목회자에게 사역을 위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사역을 현지 사역자가 위임받지 못했을 겁니다.
세번째는 파트너쉽 입니다. 선교사님들은 우리에게 영적 아비셨고, 멘토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저희와 동역자의 관계로 사역의 파트너로 사역하려고 매우 애쓰고 계십니다.
이 세가지가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침례교단의 선교 사역의 좋은 결실을 갖고 오게 된 이유 라고 생각합니다.
Q8. 카자흐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루고 계속 사역하는 것과 관련하여 한국 침례교회 선 교사들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그 역할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비보스놉 아이다르 목사
저희 선교사님들은 자신들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저희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하신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희 조상들은 평생 양을 치며 살아오셨습니다. 양들은 언제나 늑대들의 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그들에게 잡혀 먹힐것을 허락하라고 하셨습니다.
첫째로 저희 선교사님들은 저희의 언어를 배우고 익히셨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더욱 저희로부 터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서 자신의 삶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 셨습니다. 즉 주일예배에 통역자를 통해서 설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그분들의 집에 방문해, 그 분들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힘들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 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애쓰셨습니다. 90년대에 저희에게는 전기도 제대로 없었고,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빵, 설탕 등 식료품을 사기 위해서는 교환권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 울러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님들은 우리와 삶을 함 께 나눠주셨습니다. 자신들의 시간을 우리에게 헌신해 주셨고, 식탁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성경을 읽게 하셨고, 말씀을 가르쳐 주셨으며, 말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성경에 화목하는 것, 용서하는 것, 올바로 자녀양육하는 것, 충성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분들도 저희와 똑같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시면서 힘들어하고 갈등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의 자녀들이 저 희가 다니는 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의 자녀들이 현지학 교에 다니면서 얻어 맞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늘 저희 선교사님들은 “살아있는 성경책”이라고 말합니다. 이분들은 성경 말씀을 가 르치시며,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이들도 듣고 배우
지 않고 보고 배운다고 말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에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신 것 처럼 선 교사님들이 자신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의 삶을 노출 시키셨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Q9.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와 선교지도자들에게 할말/부탁
비보스놉 아이다르 목사
현재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더이상 선교사들을 보 낼 필요가 없다고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 계속 선교사님들을 파송해야 한 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예수믿는 카작민족은 전체 카작인의 1%도 안 됩니다.
존경하는 선교사님들,
여러분들을 저희 민족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주시길, 그들과 한 가족이 되어주시길 초청합니다. 그들에게는 신앙 때문에 쫓겨난 기존의 공동체를 극복하도록 도움을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일어나도록, 저희에게 하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을 가르쳐주실 영적아비가 필요합니다. 일부 타교단 현지 지도자들이 선교사님들에게 “당신들은 돌아가십시오. 우리가 스스로 사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후원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선교사님들이 그 말을 듣고 그렇게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미련한 행동이라고 생 각합니다. 어린 자녀가 “나에게 아버지가 필요없어요”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여러분들은 도움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지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새로운 교회 건물들이 세워지기 원하실 겁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이 그들 곁에 함께 계신다면, 그들에게 언제 영적인 지식이 필요한지, 언제 가족을 위해 책임감을 갖고 능력을 갖춘 인격자가 되는지, 그를 언제 지도자로 세워야 하는지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 면, 저희 선교사님들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 영혼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삼 는것. 그들은 언제나 연합하였고, 우리 또한 한 목적으로 연합하게 해주셨습니다. 저희 선교사님들의 지혜로 인해서 저희에게 중앙아시아 침례교단이 세워졌습니다. 저희에게는 유일한 중앙아시아 침례 신학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선교사님들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신앙 유산은 : 영혼 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삼고 그들의 영적인 부모가 되는 것이 교회사역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한 알렉산드르 목사
이제 다른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신 한국 목회자님들과 선교사님들과 사역자분들에게 말씀드리 고 싶습니다. 현지인들을 신뢰하시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사역을 맡기시길 바랍니다. 위험할 수 있겠 으나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현지인들을 믿어 주신다면 그들에게 사역을 위해 날아오를 날개가 생기게 됩니다. 만약에 현지인들에게 영적인 부모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셨다면, 두번째 멘토 로서 역할을 잘 해주셨다면 세번째 파트너로서 동역하시는 동안에 그들에게 믿고 사역을 맡겨주시 길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사역을 위임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사역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그 들에게 감당할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축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사역의
결과와 열매를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 드리고 싶은 제안)
저는 카자흐스탄의 복음의 1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합 니다. 저희들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저희 상황은 매우 위기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10년 후면 대 부분의 선교사님들이 떠나시게 되고 모든 사역을 현지 사역자들이 감당해야하는 시기가 다가오기 때 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후는 위기상황 즉 매우 중요하고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어떤 기도가 필요한가? 교회들이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되길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많은 교회들이 사라 졌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능하신대로 진심으로 저희를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한국교회들을 바라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지상대사명을 위임받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침례교회들은 대부분 가정교회 형태로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 다. 즉 영혼구원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의 삶에 기 쁨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전보다 더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지상대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더 행복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이 더욱 우리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더 많이 섬기십시다. 더 많이 자원들을 동원합시다. 더 많은 자원들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나 라를 위해서. 여러분들은 한국에서, 저희는 이곳에서 다 함께 이 한 방향으로 교회의 진정한 사명을 따라서 사역하십시다!
현지교단이 있을 경우 동반자선교 / 홍경환 목사 (PCK, 전 태국선교사)
- I. 들어가는 말
- II.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사례
- 동아프리카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East Africa, PCEA)
- 태국기독교회(Church of Christ in 표ailand, CCT)
- 체코형제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 of Czech Brethren, ECCB)
-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Korea-Germany-Ghana relationship committee)
- 기독교선교연대(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 EMS)
III. 나가는 말
키워드: 현지교단, 협력선교, 에큐메니칼 선교, 동반자 선교, 현지인 중심
Ⅰ. 들어가는 말
우리가 나가서 사역하는 수많은 국가들은 이미 선교사를 받아들이고 선교의 역사가 100여년이 넘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즉 서구 선교사에 의해서 이미 선교의 문들이 열려졌었고, 수많은 서구 선 교의 실수와 시행착오를 함께 겪었던 장본인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한국인 선교사란 서 양 선교사들이 돌아간 자리에 대신 보냄을 받은 선교의 계승자들이다. 현지교회와 교단들은 이미 경 험에 의해서 학습된 노하우를 가지고 있으며 선교의 초보자인 한국 선교사들에게 그들은 선교적 경 험을 통한 조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현지 교회와 교단의 경험에 기초한 조언들에 귀 를 기울여야 한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요구가 일방적으로 주고 가르치는 식의 군림하는 선교가 아니
라 동반자로 협력하는 선교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평가해야 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많은 선교사를 보내는 것으로 자랑 하기 보다는 이제 우리들의 선교의 질을 스스로 평가하고 유한한 선교적 자원들을 지혜롭게 사용해 야 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우리가 각 교단, 각 선교단체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고자 온 힘을 다해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하였지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하나의 같은 목적을 가지고도 서로 협력하지 못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 인적 물적 자원의 중복과 낭비 등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일 교수는 이러한 초창기 우리 선교가 가졌던 협력선교의 기조를 방해하 는 비협력적 문제에 대하여 선교신학의 부재로 인한 잘못된 선교관,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에 근거 한 선교구조, 물량주의, 확장주의와 같은 세속적 가치관의 반영으로 변질된 선교형태, 선교사의 자격 과 수준을 갖추지 못하고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함과 교단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전략 부재 및 관리 부족으로 인한 중복선교, 무엇보다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개교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추구하는 개교
회주의 독단주의적 선교”라고 하였다.1
우리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는 그 시작부터 협력선교의 종은 사례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 초심을 잃고, 무한 경쟁과 중복투자로 한국교회적인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선교를 지속해오고 있다. 아니 오히려 선교의 열정이 넘쳐서 그 모든 실패와 가치 있는 경험들을 정리하여 반영하지 못하 고, 가속에 의해서 멈춰 서지 못하고 질주하는 기관차와 같이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상황에 이 르렀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선교를 돌아보고, 진지하게 궤도를 수정하고, ‘더 많은 선교’에서 ‘더 바른 선교’로 우리의 관심을 전환하여야 한다.
한국교회가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선교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교회와 선교사 모두는 우리가 함께 우리들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참여하고 있다는 선교신학적 입장을 먼저 가져 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주체가 교회나 선교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목표는 하 나님의 나라 확장에 있다.
더 바른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한국 교회는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로 나아가야 한다. 현지 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는 가르치는 선교가 아니라 서로 배우는 선교요, 인간적 전략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맡기는 선교이며 분열되고 나누어지는 선교가 아니라 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이루는 선교이다.
- II.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사례
한국교회는 1910년 초기 선교 역사에서도 만주, 일본, 러시아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 파송 지역의 교회들과 협력하는 것을 기본적인 선교정책으로 삼았고, 1913년 산둥지역에 첫 타문화권 선 교사들을 파송할 때에도 본국 교회와 먼저 사역하던 서양선교단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지교회와
1 한국일, “협력선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 「2010 한국대회 제9분과 선교와 연합 자료집」, 서울: 2010 한국대회조직위원회, 25.
협력하여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하고 실행하는 협력적인 선교를 시행하였다.
1956년 해방 후 첫 타문화권 해외선교사로 태국에 파송되었던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의 경우도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현지 태국기독교단과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사역하였으며, 김순일 선교사의 경우 현지 교단의 노회장과 청년부 부장을 역임하는 등 현지 교단과 하나가 되어 일하였다.
이처럼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는 현지의 교단 그리고 교회들과 매우 협력적인 관계 하에서 함께 하는 선교였다. 우리의 초기 타문화권 선교사역은 서양의 타문화권 선교사역과 매우 다른 출발을 가 지고 있었다. 서양의 세계선교는 정복적인 선교, 식민주의적 선교, 문화우월적인 선교를 함으로써 선 교지 현지교회에 씻을 수 없는 선교적 과오를 남겼다면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는 그렇게 시작할 수 없 었음이 오히려 감사하다.
한국 교회의 선교적교회,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선교 정신을 계승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이하 PCK)는 2023년 6월 현재 44개의 동역교단2과 6개의 동역기구3를 두고 세계와 함께 하나님의 선교 에 참여하고 있다. 44개의 동역교회(교단)들은 매년 총회 임원 차원에서 교류하며 선교 협력을 전개 하고 있어서 본 교단의 선교협력에 일차적인 동역자들이다. 그 중에는 미국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 회, 호주연합교회, 스코틀랜드교회 등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일차적인 동역교회들도 있고, 남인도 교회나 필리핀그리스도연합교회, 가나복음장로교회 등과 같이 세계선교 현장에서 새롭게 만난 동역 교회들도 있다. 또한 재일대한기독교회(KCCJ)나 해외한인장로교회(KPCA)와 같이 본 교단 출신
- 아시아(17개 교회): 남인도교회(CSI, Church of South India), 북인도교회(CNI, Church of North India), 인도장로교회(PCI, Presbyterian Church of India), 메트로폴리탄마토마교회(MMTC, Metropolitan Mar 표oma Church), 대만장로교회(PCT, Presbyterian Church in Taiwan), 인도 네시아바 탁그리스도교회(HKBP, Huria Kristen Batak Protestan), 미나하사기독교복음교회(GMIM, 표e Christian Evangelical Church in Minahasa), 인도네 시아예수그리스도교회(GIA, 표e Church of Jesus Christ in Indonesia), 일본그리스도교회(CCJ, Church of Christ in Japan), 일본기독교단(UCCJ, 표e United Church of Christ in Japan), 일본예수그리스도교회(JCCJ, 표e Jesus Christ Christian Church in Japan), 재일대한기독교회(KCCJ, 표e Korean Christian Church in Japan), 태국기독교단(CCT, 표e Church of Christ in 표ailand), 필리핀그리스도연합교회(UCCP, 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말레이시아복음교회 사바(SIB Sabah), 말레이시아복음교회 사라왁(SIB Sarawak), 말레이시아복음교회 서말레이지아(SIB Semenanjung), 말레이시아바젤그리스도교회(BCCM, 표e Basel Christian Chruch of Manlaysia) 유럽(8개교회): 네덜란드개혁교회(RCN, Reformed Churchs in the Netherlands), 스위스개혁교회연맹(FSPC, Federation of Swiss Protestant Churchs), 스코틀랜드교회(CoS, 표e Church of Scotland), 웨일즈장교회, 연합개혁교회(URC, 표e United Reformed Church), 체코형제복음교회(ECCB, Evangelical Church of Czech Brethren), 프랑스연합개혁교회(ERF, I’EgliseReformee de France), 헝가리개혁교회(RCH, 표e Reformed Church in Hungary), 아프리카(7개교회): 가나복음장로교회(EPCG, Evangelical Presbyterian Church Ghana), 가나장로교회(PCG, Presbyterian Church of Ghana), 가봉복음교회(EEDG, Eglise Evangelique Du Gabon), 동아프리 카장로교회(PCEA, Presbyterian Church of East Africa), 킨샤사장로교회(CPK, Communaute Presbyterienne de Kinshasa), 에디오피아복음주의교회 메카네예수스(EECMY, Ethiopia Evangelical Church Mekane Yesus), 케냐성공회(ACK, 표e Anglican Church of Kenya), 태평양(3개교회): 호주연합 교회(UCA, Uniting Church in Australia), 뉴질랜드장로교회(PCANZ, 표e Presbyterian Church of Aotearoa New Zealand), 바누아투장로교회(PCV, Presbyterian Church of Vanuatu), 중남미(5개교회): 도미니카공화국복음교회(IED, Iglesia Evangelica Dominicana), 멕시코장로교회(INPM, National Presbyterian Church of Mexico), 브라질장로교회(IPM, Presbyterian Church of Brasil), 쿠바개혁장로교회(RPCC,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in Cuba), 볼리비아예수교장로교회(IEPB, La Iglesia Evangelica Pebiteriana Boliviana), 북미(4개교회): 캐나다장로교회(PCC, 표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 미국장로교회(PCUSA, 표e Presbyterian Chruch in America), 미국개혁교회(RCA, Reformed Church in America), 해외한인장로교회 (KPCA, Korean Presbyterian Church Abroad)
- 세계에큐메니칼기구(International Ecumenical Organizations): 세계교회협의회(WCC), 세계개혁교회연맹(WCRC),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세 계선교협의회(CWM), 미션21, 기독교선교연대(EMS)
목회자나 선교사가 현지에서 교단을 설립하거나 교단 설립을 주도한 사례도 있다.4
이제 PCK가 함께 협력하고 있는 44개 동역교단들 중 대표적인 3개 동역교단과 3국가 간의 선교 협력체인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 그리고 미래의 선교적 리더십 양성을 위한 기독교선교연대(EMS) 와의 청년교류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한다.
- 동아프리카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East Africa, PCEA)5
PCK가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함께 동역하고 있는 동아프리카장로교회(PCEA)는 선교사 모라 토리엄(Moratorium)을 주창했던 죤 카투(John Gatu)가 총회장을 했던 교단이다. 케냐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초대형 교단이며 단일 장로교단으로는 세계 최대 교단이다. 이들이 선교사 모라토 리엄을 이야기 했다고 해서 선교사들을 쫓아낸 교단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잘못된 방식의 선 교를 경계하고 경고한 것이지 결코 선교사에게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니다.
1998년 PCEA교단은 신임 PCK 파송선교사에게 교단 헌법과 역사책, 예전 집을 주면서 파트너 십을 갖기 전 서로에 대해서 알기를 요청하였고 그 후로 10년여를 기다린 끝에 교단 간 선교 협정을 맺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를 알아가는 오랜 기다림 끝에 모라토리엄을 주창했던 교단이 PCK선교사를 외국인 최초로 교구목사(Parish Minister)로 받아들었고 한 노회의 총대가 되어서 현 지 교단, 노회와 함께 다양한 사역들을 함께 하게 되었다. 한국교단의 한 지부로서가 아니라 현지의 필요에 기반을 두고 현지교단의 이름과 감독과 대외적인 책임 아래 사역을 하고 있다.
이들의 부족한 부분들에 대한 선교사의 역할이 있다.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 하지 못하는 것을 돕는 일이다. PCEA는 크고 강력한 교단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부족이나 국가의 경계를 넘는 타문 화권 선교에 대한 관심이 미미하고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이 일에 협력이 강화되었다. 주로 프로젝트와 교 육을 위한 재정은 PCK가 제공하지만 건축부지와 건축, 교육과정 작성, 학생모집과 학과 운영 등은 PCEA 총회와 대학 당국이 담당하였다.
- 태국기독교회(Church of Christ in Thailand, CCT)6
태국기독교단(CCT)은 태국 개신교중 유일하게 전국 4개 지역에 1,650여 개의 지역교회와 24개 의 노회를 구성하고 있는 초교파 연합교단이며 현지 지도자들에 의해서 완전한 자치를 하는 교단이 다. 대한민국보다 50여년이나 앞서 복음이 전해졌고 그동안 서양 선교사들의 다양한 선교형태를 경 험한 교단이기에 잘못된 선교와 바른 선교의 기준이 명확하며 선교협력에 대한 많은 노하우를 가지
4 황홍렬,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서울: 부산장신대학교 세계선교연구소, 2015, 37.
5 예장통합 총회(PCK)와 2007년 선교협약(MOU) 체결.
6 예장통합 총회(PCK)와 1986년 선교협약(MOU) 체결.
고 있는 교단이기도 하다.
태국기독교단은 지난 선교역사를 통해서 꾸준히 성장한 교단이다. 다만 그 성장의 총합은 전체 인구와 인구증가율에 비해서 미미함이 안타깝다. 태국기독교단은 교육 및 의료사역에 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교회개척과 세계선교는 미흡한 특색들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과 함께 협력할 분 야가 그들의 필요에 잘 나타나 있다.
PCK와 CCT 양 교단의 협력선교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1956-1962년은 한국교회와 태국교
단 협력선교의 ‘개척기’이다. 1955년 해방 후 최초로 최찬영, 김순일 두 가정의 선교사를 그들의 동역 자로 파송하였다. 1986년-1995년은 양 교단 협력선교의 ‘재개기’이다. 1986년 선교협정서를 조인함으 로 동반자로서의 협력선교의 길을 다시 열었으며 선교사 한 가정을 파송하였다. 1996-1998년은 양 교단 협력선교의 ‘기초기’이다. 선교협정을 맺은 10년 뒤인 1996년 양 교단은 선교협력 10주년을 기 념하면서 제1차 ‘선교협의회(Mission Consultation)’을 개최하고 선교협약서를 갱신함으로 좀 더 긴 밀한 선교협력을 결의하였다. 1999년-2007년은 양교단 협력선교의 발전기이다. 이 때 태국 PCK현지 선교회가 조직되고 북부, 중부, 남부 거점 사역지에 PCK선교사들을 파송하며 활발하게 사역을 발
전시켜 나갔다. 2008년이후 부터 현재까지는 양 교단 협력선교의 ‘확장기’이다. 2008년부터 양 교단 의 동반자 선교는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양 교단 총회 임원들이 상호 방문과 논의를 통하여 선교를
위하여 다양한 협력사역들을 확장하였고 최근에는 한국 내 태국 이주민노동자들을 위해서도 함께 협력할 것을 논의하였다.
PCK선교정책에 의하여 PCK태국현지선교회의 태국 선교전략은 다음과 같다.7
- 복음주의 에큐메니칼 신학에 입각한 협력 선교(Evangelical Ecumenism)
- 2. 통전적 선교(Holistic Mission)
- 현지 교회와의 선교 협력자로서의 선교(Mission Partnership): 현지인을 앞세우고 선교사는 배후에서 협력과 지원의 역할을 한다.
- 4. 현지 교회가 스스로 사역을 감당하도록(자립)하고, 선교사는 현지 지도자를 세운다.
- 현지 교단의 노회, 기관, 총회와 사역을 상의하여 선교사를 초청하고 선교사는 노회와 기관에 속하여 협력자로서 사역한다.
- 선교사 초청 시 태국 총회, 노회, 기관들과 긴밀한 협력 하에 현지교회가 초청하게 한다. 선교 사역 주에 필요한 사역이 있을 시 현지교단과 상의하여 초청한다.
- 7. 각 선교사가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고 교단 선교사들 간에 협력한다. 양 교단이 사역을 평가하 고 미래의 사역을 개발한다.
- 8. 태국 각 지역의 문화와 교회의 필요에 따른 특성을 살리는 사역을 한다.
- 동남아 선교를 위하여 태국 교단과 협력한다.
7 태국현지선교회, 『총회태국현지선교회 소개책자』, 6.
- 10. 태국 교단으로 하여금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협력한다.
- 체코형제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 of Czech Brethren, ECCB)
체코형제복음교회 ECCB는 유럽 36개국의 정교회를 포함한 112개 교회(교단) 유럽교회들의 연 합기구인 ‘유럽교회컨퍼런스’(The Conference of European Churches)의 회원교회이면서, 현재 105 개 유럽 프로테스탄트 교회(교단)들로 구성된 유럽 프로테스탄크 커뮤니티(Community of Protestant Churches)의 출발이었던 1973년 로이엔베르그 협약(Leuenberg Agreement)를 맺었던 4개의 유럽 전 통개혁교회(루터교, 장로교, 왈도파, 체코형제복음교회)들 가운데 하나이다. 체코형제복음교회는 서 구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보다 100년 이전에 시작된 전통 개혁교회이며, 오랜 가톨릭의 박해와 사회 주의의 탄압아래에서 폐쇄적이지만 교회일치 운동에는 적극적 자세를 지니고 있는 교단이다.8
유럽 후기 기독교 상황에서 복음화를 위해 체코교회의 사회적 신뢰회복은 피할 수 없는 가장 우 선되는 과제이며 결정적인 선교이기 때문에 PCK는 폐쇄적인 지역교회들을 선교적교회들로 변화를 추진하는 일에 한국 교회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있으며 교단의 ‘선교와 전도 자문위원회’와 ‘에큐메
니칼 자문위원회’에서도 함께 일하고 있다.
ECCB는 교회의 모든 활동은 “품위있게” “에큐메니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9PCK의 체코선교는 현지 교회들이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성취할 수 있도록 교단차원에서 노회차원 에서, 지역교회 차원에서, 또는 초교파적인 모임 안에서 한국교회의 경험을 나누는 일, 동역하는 일, 선교적 도전을 하는 일, 목회자 및 평신도를 교육하는 일, 연대와 협력을 조직하는 일, 교회를 개척하 는 일, 한국 기독교 이단들의 활동이 지역교회에게 침투되지 못하도록 막는 일 등으로 참여하고 있다.
-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Korea-Germany-Ghana relationship committee)
1828년 독일어권 바젤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가나에 복음을 전한 것을 시작으로 독일서남부 에 위치한 팔츠주교회와 가나장로교회 간에 교류가 있었다. 독일 팔츠주교회는 가나의 중부와 서부 지역 노회들과 에큐메니칼 선교협력의 일환으로 평신도 훈련과 조산원, 학교 등의 사역을 지원하고 있었다. 1997년 이후부터 팔츠주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재정이 줄어들자 지속적인 선교 사역을 위 해 아프리카 선교에 관심이 있는 한국 교회와의 협력선교를 제안하게 되었다.10
독일 팔츠주교회는 이미 1984년부터 PCK총회와 선교협력MOU를 맺고 있었지만 교단 간의 의 례적인 교류보다는 실제적인 지역교회와의 협력 관계를 맺고자 노회차원의 파트너십 맺기를 희망하
였다. 이 일에 영등포노회가 함께 함으로 2000년 5월 ‘한·독교회협력위원회’가 발족되었고 곧이어
8 황홍렬,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48-49.
9 이종실, “유럽복음화와 한국교회의 역할-PCK유럽선교 모델제안,” 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선교와 신학』 제33집(2014), 115-155참조.
10 영등포노회,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 역사,” 미간행 자료집, 2010, 1.
10월에는 팔츠주교회가 소개한 가나장로교단의 볼타노회와도 자매결연을 맺게 되어 기존의 ‘한·독
교회협력위원회’는 삼국교회 간의 선교협력으로 이어진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로 확대되었다. 실제적인 에큐메니칼 선교협력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영등포노회로서는 ‘한·독·가교회협력위원
회’를 통해서 개 교회 중심적인 한국교회의 세계선교가 에큐메니칼 협력선교로 이뤄지지 못한 단점 을 극복할 수 있었고, 또한 복음적인 특징을 보인 한국교회가 오랜 선교전통을 가진 독일교회와 선 교지 교회의 특성을 지난 가나교회와의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11
이들의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가나교회의 자립을 도울 컴퓨터훈련학교를 함께 설립하 여 운영하였다. 이들이 함께 세운 컴퓨터훈련학교는 지방에 설립되어 낙후된 지역 학생들에게 교회 기 회를 제공하였고, 특별히 장애인 학생들을 훈련하여 강사로 발굴하여 양성하였다. 또한 지방 교도소 와 협력하여 집단수용시설에 컴퓨터교실을 보급하여 재소자 갱생프로그램을 도입하는데 공헌하였다.
삼국교회 동반자 선교협력인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는 서구교회처럼 노회 단위에 동반자 협 력선교를 위한 전담인력이나 기구가 없는 한국교회로서 동반자 선교를 추진해 갈 수 있는 좋은 모
델이 되었다. PCK 영등포노회가 독일 팔츠주교회와 가나의 볼타노회와 진행한 선교협력은 양자 간(Bilateral Relationship)의 협력선교가 아니라 선교 역사상 유래를 보기 드문 삼자간(Trilateral Relationship) 협력선교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선교협력은 가나와 한국교회뿐만 아 니라 선교의 오랜 전통을 가진 독일교회에서도 처음 해보는 새로운 도전이다.
삼국교회간 선교협력은 한국식으로 맡겨진 일을 책임감 있게 역동적으로 진행하고, 독일식으로 계획성 있게 단계별로 추진하며 여러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가나식으로 서로 존중 하며 의논함으로 진행된 선교사역이다.
- 기독교선교연대(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 EMS)
EMS는 1972년 독일 남서부 바덴, 팔츠, 뷔르템베르크주 등 5개 선교단체와 6개 개신교회에 의 해 설립되었다. 이후 전 세계 23개 교단 및 5개 선교기관과 맺은 ‘동역자’ 관계를 ‘회원’으로 국제화하 며 글로벌 선교단체로 발전하였다. EMS는 예배와 기도 공동체로의 강화, 성숙한 선교관계의 지속과 강화, 사업의 국제화와 참여 규모 확대,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복음주의 친교전략과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지지하고, 지구적 위기 특히 빈곤퇴치, 인권과 평화, 창조 보존을 위한 공동의 헌신을 위해 연대하고 있다.
EMS와 PCK가 함께 협력하고 있는 여러 사역중 하나는 청년자원봉사 프로그램이다. 청년자원 봉사프로그램은 EMS기관에 PCK 청년이 1년 동안 EMS에 속한 여러 곳을 방문하며 자원 봉사를 하고, 마찬가지로 EMS청년도 PCK 교단 본부를 통하여 1년 동안 PCK에 속한 교회와 선교기관들
11 이명석, “영등포노회·가나장로교회·독일팔츠주교회의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에큐메니칼 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서울: 부산장신대학교 세계 선교연구소, 2015, 131.
을 방문하며 자원 봉사하는 청년인적교류 프로그램이다.
청년을 보내는 교단(기관)이 항공비와 소량의 용돈을 지원하고, 받는 교단(기관)이 숙소와 소량 의 생활비를 함께 지원한다. 현재 독일에서 온 청년 두 명이 PCK 총회에서 여러 업무를 지원하면서 한국교회를 경험하고 있고 PCK 소속 선교기관들의 행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 입국 전 미리 한 국어를 공부하고 입국 후 첫 2달 동안 한국어를 집중교육 한 후 전국에 있는 교회와 선교기관들을 지원하고 있다.
- 나가는 말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 교회의 선교가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7년 인구절벽에 이어 조만간 ‘교인 절벽’같은 교회 존립의 위기에 부닥칠 것으로 예견하는 이들도 있다. 미래의 한국교회와 선교를 대비해 다양한 시도들이 요청되는데 그중 하나가 ‘세계선교의 구조조정’이다. 이런 위기 앞에서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는 현지인중심의 동반자선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고비용 저효율 구조의 선교’로부터 ‘저비용 고효율 구조의 선교’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다른 나라에 들어가 주인 노릇하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지교 단의 구성원이 되어 그들의 지도와 통제를 따르며 협력하는 동반자 협력선교이다. 일단은 현지교단의 배려와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이민국의 까다로운 절차들이 한결 수월해진다. 무엇보다도 선교사역 의 연속성과 교회의 하나 됨이 보장된다. 선교사가 하던 사역을 중단하게 되어도 그 사역 자체는 현 지교단에 의해서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다.
2세대, 3세대를 이어 갈 수 있을지 보장이 안 되는 현지사역에서 신학교를 세우고 교단을 세우고 하는 일들을 사역의 연속성과 교회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동반자선교는 너무나 당연하 다. 엄청난 투자와 함께 선교사 당대를 잘 보내었지만 선교를 위하여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선교 지의 재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한국교회가 현지인중심의 동반자 협력선교를 주목하는 배경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경 쟁적이며, 비협력적이고 성과주의적인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대한 반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반자 선교에는 어려움도 있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선교 방법이다. 사역이나 프로젝트의 목적 에 대한 이해와 관점의 차이, 일을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차이 등에 있어서 만일 현지교회 없이 독자 적 선교단체나 선교사로서 진행하였으면 필요하지 않았을 절차와 기나긴 줄다리기로 선교사나 후원 교회가 지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동반자로 함께 가는 것에는 언제나 기다림이 필요하며 그 기다림의 열매는 언제나 더 풍성하다.
[토론과제]
- 동반자 선교와 반대되는 선교 개념은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논의해 보자.
- 2. 동반자 선교가 선교지에서 어렵다고 느껴지는 때는 언제인가?
- 동반자 선교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
참고문헌
박사학위논문
곽명근, “동반자 선교에 관한 선교학적·구약신학적 연구” 주안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1.
석사학위논문
최승근, “태국에서의 동반자 선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2011. 단행본 김순일, 『한국선교사의 가는 길』, 성광문화사, 1980.
박기호, 『한국교회 선교운동사』, 199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에큐메니칼위원회 편, 『세계선교와 에큐메니칼 연대 선교협력 자료집』,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2008.
황홍렬편저, 『에큐메니칼협력선교: 정책, 사례, 선교신학』, 부산장신대 세계선교연구소, 2015.
국내학술논문
김영동, “동반자 선교의 신학 정립과 실천적 방양 연구”, 「선교신학」 53집, 2019.
김종성, “동반자선교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선교 교육 재고찰”, 「미션네트워크」 제6집, 2018.
서정운, “함께하는 선교”, 명성교회선교연구위원회편, 『동반자선교를 통한 21세기 선교방향 모색』, 명성교회 해외선교부, 2009.
손윤탁, “디아스포라교회의 성장과 선교”, 한국선교신학회, 『선교신학』, 제27집 2권.
이종실, “체코형제복음교회와의 협력선교 사례보고”, 『총회 에큐메니칼 선교포럼』, 미간행자료집, 2014.
조준형, “동반자 선교를 통한 태국선교”, 『동반자 선교를 통한 21세기 선교방향 모색』, 명성교회 선교연구위원회, 2009.
태국현지선교회, 『총회태국현지선교회 소개책자』
한국일, “협력선교에 대한 신학적 근거”, 『2010 한국대회 제9분과 선교와 연합 자료집』, 한국대회조직위원회, 2010.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트랙 최종보고서
- 1. 트랙 이름
–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 트랙 소개
– 재생산하는 토착교회개척 원리, 선교지 교회가 개척 초기부터 중심이 되는 선교, 초기 한국교 회의 기초가 된 자립, 자전, 자치하는 선교지 교회가 되기 위한 선교전략, 선교지 진입전략, 선교지 이 양과 출구전략
- 트랙 리더들
1) 홍경환 목사(현 예장(통합)총회 해외다문화선교처 총무, 전 태국 선교사)
2) 주민호 목사(현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회장, 전 카자흐스탄 선교사)
3) 김동찬 목사(현 예장(통합)총회 해외다문화선교처 본부선교사, 전 인도네시아 선교사)
4) 김광성 목사(현 주안대학원대학교 교수, 전 한국복음주의선교신학회 회장)
5) 조해룡 목사(현 주안대학원대학교 부교수, 전 호남신학대학교 조교수)
6) 노태민 목사(현 예장(통합)총회 해외다문화선교처 /담당업무: 해외교회들과의 교류)
- 트랙 모임 현황
1) 1차-일시: 2023.03.03. / 장소: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해외다문화선교처 사무실 내용: NCOWE 운영위원장의 요청 나눔, 트랙 진행 기획안 나눔
2) 2차-일시: 2023.03.20. / 장소: 기독교한국침례회 세계선교회 사무실
내용: 트랙명 결정, 트랙 발제자 조정, 트랙 진행 방법 논의, 추가 리더십 확충 논의
3) 3차-일시: 2023.04.17. / 장소: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3층 회의실
내용: 트랙 진행 방법 논의, 트랙 발제 검토, 최종 Pre-consultation 일정 확정
4) 4차-일시: 2023.05.12. / 장소: 큰숲비전센터
내용: 트랙진행 방법 논의, 트랙 발제 검토
5) 5차-일시: 2023.06.02. / 장소: KWMA 사무실 내용: 최종 발제 검토, 트랙진행 방안 확정
- NCOWE 사전 배포 자료집에 넣을 발제물 목차나 관련 자료 업데이트
- 초기 한국선교의 동반자 선교 (김광성 교수/주안대학원대학교)
- 들어가는 말
- 2. 동반자 선교의 선교학적 의미
1) 동반자 선교와 에큐메니칼 협력 선교의 신학적 의미
2) 로잔운동과 동반자 선교
- 초기 한국 선교 시기 동반자 선교
- 4. 나가는 말
- 2. 현지교단이 있을 경우 동반자 선교 (홍경환 목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총무)
- 들어가는 말
- 2.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사례
- 동아프리카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East Africa, PCEA)
- 태국기독교회(Church of Christ in 표ailand, CCT)
- 체코형제복음교회(Evangelical Church of Czech Brethren, ECCB)
- 한독·가교회협력위원회(Korea-Germany-Ghana relationship committee)
- 기독교선교연대(Evangelical Mission in Solidarity, EMS) 나가는 말
- 현지인 교회와 교단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어 진행 중인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 침례교 선교사들의 중앙아시아 사역 교훈 (주민호 목사/FMB 해외선교회 회장) 1. 들어가는 말
- 2. 중앙아시아 침례교회들과 총회의 현재 사역 상황
- 동반자 선교가 가능한 현지 교회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선교사역의 특징들
- 4.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가 가능한 교회들로 성장하는데 기여한 내적 요인들
- 중앙아시아 침례교회 사역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에 주는 교훈
- 6. 나가는 말
- 4. PCK와 인도네시아 교단과의 동반자적 협력 사역
(김동찬 선교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본부선교사)
- 들어가는 말
- 2. 인도네시아교회 요청에 의한 PCK 선교의 시작
- 본격적인 동반자적 협력 선교와 선교의 형태
1) 교단 신학교를 통한 협력
2) 교회 개척과 목회
3) 목회자 계속교육과 교회 지도력 개발
4) 한국의 인도네시아 근로자를 위한 GIA 교단의 선교사 파송
- 4. PCK 선교의 다변화와 다양화를 가져올 동반자적 협력 선교
- 나가는 말
- 중앙아시아 현지인 지도자 인터뷰 영상
- 한 알렉산드르(Aleksandr Han) 목사 / 중앙아시아침례교총회 총회장
- 2. 비보스놉 아이다르(Aidar Bibbosynob) 목사 / 중앙아시아침례교총회 총무
- 6.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실천적 적용 (노태민 목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 들어가는 말
- 2. 동반자 선교를 하지 않는 선교에 대한 현지인들의 비판
-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강점
- 4.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시 고려사항
- 나가는 말
- NCOWE 트랙 운영 계획 및 진행 사항
1) 첫 번째 시간
(1) 발제 (좌장: 조해룡 교수/주안대학원대학교) (2) 질의응답
- 초기 한국선교의 동반자 선교 (김광성 교수/주안대학원대학교)
※ 토론과제
1) 초기 한국 선교 역사에서 발견한 동반자 선교 사례를 현대 선교신학에서 말하는 동반자선교 개념을 적용하여 설명해 보자.
2) 동반자 선교의 신학적 근거인 하나님의 선교와 실천적 사례인 에큐메니칼 협력선교의 연관성
을 복음주의적 선교 입장에서 논의해보자.
3) 한국장로교회가 최초로 타문화 선교를 결의하고 수행할 때 한국에 있는 서구교회 선교회, 중국 교회와 사전에 협의하게 된 이유는 한국 교회의 성숙한 태도였을까 아니면 한국 교회에가 서구 교회의 영향 하에 놓여있었기 때문일까?
- 2. 현지교단이 있을 경우 동반자 선교 (홍경환 목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총무)
※ 토론과제
1) 동반자 선교와 반대되는 선교 개념은 무엇이며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논의해 보자.
2) 동반자 선교가 선교지에서 어렵다고 느껴지는 때는 언제인가?
3) 동반자 선교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현지교단이 없을 경우 동반자 선교 (주민호 목사/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FMB) 회장)
※ 토론과제
1) 초창기부터 선교사들이, 그리고 생겨난 현지인 리더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서로를 듣고 함께 기도하는 일들이 계속되면서 선교적 리더십 코뮤니타스가 형성된 것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를 위한 중요한 동력이었다고 말하는 내용에 대해 자신들의 경험을 반영하여 토론하라.
2) 선교사들 및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인격적 신뢰 관계 형성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로
가는 길목에서 중요했고, 인격적 신뢰 관계를 키우는 데는 선교사들의 자발적 낮아짐과 연약함의 노 출, 현지인과 선교사들의 하나님의 가족 체험 등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보고에 동의하는가? 이 주 제와 내용을 주제로 토론하라.
3) 선교지 사역의 현지화와 동반자 선교사 안되는 한 이유가 재정의 불균형과 외부 재정 의존성 때문이라고 발제자는 지적했는데, 현지 교회의 재정 건전성과 독립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주제로 토론하라.
4) 선교사와 현지인 교회/리더십의 역할 변화에 대한 4P 단계를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에게도 설 명하고 그들을 강화하는 과정이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에 정말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보는가?
2) 두 번째 시간
(1) 발제 (좌장: 주민호 목사/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FMB) 회장) (2) 질의응답
- PCK와 인도네시아 교단과의 동반자적 협력 사역
(김동찬 선교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본부선교사)
※ 토론과제
1) 동반자적 협력 선교의 관점에서 나의 선교와 나의 단체의 선교는 어느 정도 동반자적 선교를 수행하고 있는가?
2) 동반자적 협력선교가 앞으로 한국교회에 어떤 선교적 토양과 지형의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 2. 중앙아시아 현지인 지도자 인터뷰 영상
1) 한 알렉산드르(Aleksandr Han) 목사 / 중앙아시아침례교총회 총회장
2) 비보스놉 아이다르(Aidar Bibbosynob) 목사 / 중앙아시아침례교총회 총무
-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의 실천적 적용 (노태민 목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 토론과제
1) 현지교단이 있는데 동반자 선교를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2) 현지교단과 동반자 선교를 하기 위해 신뢰관계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3) 세 번째 시간
(1) 트랙 제안서 나눔 (좌장: (홍경환 목사/PCK 해외다문화선교처 총무) (2) 패널 토론
(3) 최종제안서 토론
4) 네 번째 시간: 종합 발표 내용
* 주요 발제자들과 발제물, 질의 응답 및 토의 질문과 내용, 제안된 내용
- 7. 트랙선언문에 제안될 두 가지 내용과 구체적인 Action Plan
우리는 한국선교가 동반자선교로 시작한 좋은 사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반자 선교 를 지속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며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 한국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지양하고 현지교회와 협력하며 세계교회와 함께하는
동반자 선교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 2. 한국교회는 동반자 선교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속적인 모임을 갖고 소통할 것을 제안한다.
- 한국교회는 파송단체, 후원(교)회, 현장선교사가 건강한 동반자 선교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속적이고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것을 제안한다.
- 6. 15.
제8차 NCOWE ‘현지인 중심의 동반자 선교’ 트랙 참가자 일동
강성일(PCK), 강연희(MMTC), 공순규(토브교회), 김경순(백석세계선교회), 김광성(JIU), 김나단 (CNCC), 김동찬(PCK), 김상칠(PCK), 김성일(GP), 김수진(선창교회), 김신애(사명의교회), 김영 섭(GMS), 김종민(GBT), 김창수(GMS), 김혁(선창교회), 김현미(쿠웨이트한인연합교회), 노명숙 (FMB), 노태민(PCK), 맹갑균(GMS), 문성주(GMS), 문승호(FMB), 박기호(GMS), 박정곤(고현
교회), 박정민(HIS), 서영만(CIS), 성용국(EWC), 양덕훈(GMS), 윤상혁(KPM), 이금주(FMB), 이 대학(풀뿌리선교회), 이동성(아멘교회), 이용돌(PCK), 이은용(PCK), 이효진(LALA/CNCC), 장 홍준(대전산성교회), 전학진(SIM), 조해룡(JIU), 주민호(FMB), 최광규(GMP), 최달수(HIS), 최미
언(PCK), 최용준(PCK), 하화평(KCM), 허석(KMC), 홍경환(PCK)
